숙종의 정치실험, 삼인동사((三人同事)- 이재성회원

운영위원으로 활동하시는 이재성회원이 평화뉴스에 기고한 글입니다. 옮겨 싣습니다.

지난 4.29 재보궐 선거 결과를 두고 정치판에서는 수읽기 싸움이 부산하다. 한나라당의 ‘0대5 완패’로 끝난 이번 재보궐 선거가 개인적으로는 오랜만에 맛보는 즐거움이기도 하다. 물론 재보궐 선거가 유권자들의 견제심리에 의해 야당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선거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할 필요가 없다고들 하지만 어쨌든 요즘처럼 즐거운 날이 없을 때는 살짝 기뻐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우선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이후 재보궐 선거에서 ‘40대0’이라는 불패신화를 이어가고 있던 한나라당의 입장에서는 이번 패배가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조선일보의 축소보도가 어느 정도 위로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참패의 아픔을 감추기엔 충격이 컸을 테다.

실제로 지난 4일 민본21의 기자회견에서 나온 ‘쇄신’이라는 단어의 등장이나, 6일 남경필․원희룡 의원 그리고 MB직계인 정두언 의원까지 가세한 이른바 ‘원조 소장파’의 기자간담회에서의 지원사격이 한나라당의 참담한 분위기를 대변해 주고 있지 않는가. 하지만 그 쇄신의 격랑도 불과 1주일이 안돼 김이 다 빠져 버린 형국이다. 청와대의 냉담한 반응에 재보선 참패 이후 쇄신바람이 불자 몸을 바짝 낮추고 있던 친이 진영의 목소리가 오히려 높아지고 있는 모습이다. 반동의 불씨가 되살아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번 재보궐 선거로 민주당과 진보세력은 유권자들로부터 신뢰를 받았는가? 필자는 양측 모두 유권자들로부터 새로운 대안으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 점에서 양측에는 아직도 ‘새로운 대안’이 없어 보인다. 전주에서 확인된 호남지역주의, 부평에서의 승리가 개혁세력으로서의 민주당을 전면 인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 울산의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연대가 진보세력의 통합을 의미하지 않는 한시적 정치연대라는 점에서 아직도 많은 숙제를 안고 있다.

선거의 결과와는 상관없이 정부와 여당은 민심이 형성될 수 있는 싹을 자르고 과거처럼 순종하는 어리석은 국민을 만들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들은 이미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결사의 자유, 집회 및 시위의 자유 등 시민의 온갖 기본권을 전면적으로 위협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비극은 민심을 거역하는 것이 단지 현 정부와 여당만의 특징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권력을 장악한 정부는 언제나 민심을 거역하고 민심을 억압하고 조작해 왔다. 그런데 문제는 그 과정에서 좌.우를 떠난 많은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이 좌고우면하면서 권력을 나누어 함께 누리고 있다는 데 있다. ‘그들은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 않고 해석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 세상에는 불평과 불만은 가득하나 행동이 없고 캥한 침묵만 감돈다.

예나 지금이나 여당 내의 계파 세력싸움이나, 여야의 권력창출을 위한 대결상황을 살펴보면 정치적 발전을 찾기란 쉽지 않다. 역사는 과거와의 지속적인 대화라고 했던가. 조선시대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당쟁이 가장 심했던 숙종 시대를 만날 수 있다. 숙종 시대에는 예송(禮訟)과 환국(換局)이 거듭되는 정변으로 여야 간에 서로 죽이고 죽는 살육전이 전개되었던 시기다.

숙종은 당쟁의 환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송시열, 윤증, 박세채 세 명에게 정치를 전담하게끔 하는 왕명을 뜻하는 삼인동사(三人同事)의 명을 내렸다. 말하자면 각기 개성과 당파성이 다른 당대 최고의 인물로 평가받는 세 사람이 협력하여 멋진 정치를 해보라고 주문한 것이다. 당시 우암 송시열은 노론을 대표하는 핵심 인물이었고, 명재 윤증은 조정에서 스무 번이나 벼슬을 준다고 해도 받지 않고 거절했던 소론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남계 박세채는 노론과 소론의 중간에서 탕평론을 주장하는 입장에 서있었던 당대 논객이었다.

일생동안 벼슬을 하지 않았으며, 사후에 백의정승으로 이름난 윤증이 딱 한 번 조정에 입각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민했던 시기가 있었다. 이때 명재는 남계와 밤새워 토론하면서 입각을 위한 세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첫째, 서인은 남인의 쌓인 원한을 풀어주어야 하고, 둘째, 외척의 세도를 막아야 하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이 다른 자는 배척하고 당에 순종하는 자만을 등용하는 풍토가 바뀌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명재가 가장 역점을 두었던 것은 첫째 조건인 ‘지역감정의 해소’였다. 당시의 남인, 즉 영남학파의 경상도 사람들은 경신환국을 당해서 서인들에게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지역감정은 호남이 피해자지만 17세기 당시의 지역감정은 영남이 피해자였다. 남계는 명재의 입각 조건을 심정적으로는 공감했지만 현실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 결과 우암을 포함한 세 사람 모두 정치에서 물러남으로써 숙종이 구상했던 정치 실험은 실패하고 만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여전히 한국사회의 정치판에서는 지역감정을 확인해야 하고, 민심을 천심으로 여기고 정치 실험을 구상하는 대통령도 없으며, 그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주변에는 ‘형님’으로 대변되는 세도 세력들의 발흥과 순종을 미덕으로 삼는 정치모리배 및 계파 정치집단의 발호만 넘실댄다. 늦었지만 우리는 역사가 던지는 물음에 진지한 답변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이재성 칼럼 8]

이재성 /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계명대 교양과정부 교수.
대구사회연구소 기획조정실장. ssyi@kmu.ac.kr

댓글 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