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은 사회적인 죄악이다.

‘가난은 잠시 불편할 뿐’이라는 말은 가난을 뼈저리게 느끼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다. “가난은 일시적인 결함이지만 지나친 부유함은 영원한 질병이다.” 라는 칼릴 지브란의 말은 그래서 공허하다. 물론 인간의 탐욕을 경계하기 위한 경구성 발언이었겠지만, 어쨌든 빈곤의 나락에서 헤매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배부르고 등 따신 자의 위선쯤으로 들릴 것이다.

프랑스 혁명 당시 성난 프랑스 군중들이 “빵을 달라”고 외쳤을 때 철딱서니 없는 왕비 마리 앙뜨와네트는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라”고 말했다던가. 영화 ‘리틀 킹’에서는 굶주림에 시달리던 어린아이가 책에서 오려낸 음식그림을 접시에 놓고 썰어서 먹는 장면이 나온다. 천천히 종이를 씹어서 삼키며 맛을 음미하는 표정은 슬프다기보다 섬뜩하다. 종이음식을 삼키며 배고픔을 달래게 하는 고통이 바로 가난인 것이다. 가난은 일시적인 결함이 아니라 치명적이며 지속적인 고통이다.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 가난한 사람과 가난하지 않은 사람. 그리고 그들은 같은 세상에서 다른 세상을 살아가기 마련이다.

아메리카 속의 아프리카

아사직전의 소녀를 독수리가 노리고 있는 사진이 있다. 남아공의 사진작가가 찍어서 퓰리처상을 받았던 이 사진은 기아로 허덕이는 아프리카를 상징하는 것으로 꼽힌다. 검은 대륙 아프리카는 빈곤과 기아의 대명사이다. 놀라운 것은, 세계 최강대국인 아메리카도 빈곤한 아프리카의 상처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는 점이다. 태풍 카트리나가 휩쓸고 간 뉴올리언즈에는 태풍의 잔해보다 빈곤의 흔적이 더 크게 남아 있었다. 아메리카인지 아프리카인지 분간이 안 된다는 비아냥을 들을 만큼. 태풍이 인종갈등이라는 국가적인 문제를 까발렸다고 하지만 뉴올리언즈 재난의 핵심은 빈곤문제이다. 예고된 자연재해 앞에서 망연자실 당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자동차가 없어서 대피조차 할 수 없었던 가난한 사람들이었으니 말이다.

‘뉴욕타임즈’의 한 칼럼니스트는 뉴올리언즈의 재난보다 더 수치스러운 것은 이로 인해 미국사회의 빈부격차가 드러난 것이라고도 했다. 부자나라에도 가난한 사람들은 차고 넘친다는 것, 알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놀랐다.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아프리카든 아메리카든 가난 때문에 죽음에 내몰리는 사람들을 보며 드는 생각은 하나다. 어쨌든 가난이 죄라는 것.

우리나라 빈곤인구 600만 명, 인구 8명당 1명.

낡은 티비를 바꾸고 날렵한 홈시어터를 들여놓고 싶은데 가계지수가 불안해서 못한다면 그것은 빈곤이 아니다. 해도 그만 못해도 그만인 것은 빈곤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적 박탈감일 뿐이다. 빈곤이란 가난 때문에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누리고 살아야 할 것을 하지 못하는 것, 바로 절대적인 박탈감을 체험하고 사는 것이다. 3개월 치 전기료 10만원을 납부하지 못해 전기가 끊겨 촛불을 켜고 지내다가 화재가 나서 타죽고, 4살배기 아이가 병원치료를 받지 못해 장롱 속에 죽은 채 방치되고, 생활고를 비관한 엄마가 어린 자식과 아파트 난간에서 뛰어내리는 나라, 바로 세계 경제 순위 11위를 자랑하는 우리나라의 현주소이다.

기아선상의 아프리카를 보며 한숨을 쉬거나, 전시상황에 가까운 미국의 재난을 보며 ‘악의 핵’이라고 혀를 차고 있을 처지가 아닌 것이다. 빈곤의 문제는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니라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최근 보건복지부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빈곤인구는 6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인구 8명당 1명꼴이니, 빈곤층이 차지하는 비율이 10 %대를 넘어섰다. 경제가 양극화됨에 따라 빈곤계층의 규모는 커질 수밖에 없다. 빈곤층이 빈곤의 대열에서 벗어나기는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렵지만, 중산층이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되풀이되는 빈곤의 악순환

부자 되는 비법을 알려주는 온갖 책들이 실용서적이라는 이름으로 베스트셀러 자리를 석권한지는 오래다. 그런데 서점의 어디에도 빈곤에서 벗어나는 비법을 알려주는 책은 없다. 책 한권 읽고 빈곤에서 벗어나기는 풀뿌리 하나 다려먹고 불로장생을 꿈꾸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일까. 굳이 ‘빈익빈 부익부’ 라는 고전적인 용어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부와 가난은 끈질기게 세습된다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사실이다. 돈이 돈을 벌고, 학벌이 돈 버는 밑천이 되는 천민자본주의 사회에서 빈곤의 악순환은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빈곤선 이하의 생활을 하는 가구와 상위층 가구의 교육비 격차는 거의 10배 정도의 차이가 난다고 한다. 고소득층 자녀의 경우 높은 교육비 지출을 통해 또다시 부의 재생산이 보장되는 반면, 빈곤계층은 열악한 교육환경으로 인해 자식들에게 가난을 세습하게 된다. 빈곤계층은 질병에서도 차별을 당한다. 소득수준이 낮을수록 영양 섭취의 불균형으로 각종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고, 질병으로 인한 의료비 지출은 가난을 극대화시키기 마련이다.

빈곤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방법은 무엇일까 ? 부자들에게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요구하기에는 우리 사회의 도덕적 부피감이 너무 얇고, 십시일반 ‘나눔’의 실천이 빈곤을 해결한다는 것은 허약한 환상에 불과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의 분배는 결국 권력의 의지에 의한 강력한 사회복지 정책에 달려있다. 부자에게 세금을 매기고, 빈자에게 사회복지를 실천하는 것, 그것이 고루 잘사는 사회의 첫걸음이다. 세계최강의 경제력을 지닌 아메리카가 부자들 세금 덜어주고 국부를 전쟁에 쏟아 붓느라 빈곤의 상처를 키운 것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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