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와 사람

박물관이 새로운 사회교육의 장으로 그 필요성이 강조되고, 또 문화양식을 요구하는 층이 늘어나면서 자신의 기능과 의미를 확장시키고 있는 때에, 국립중앙박물관은 용산으로의 이전과 함께 새로운 역작을 내놓았다. 아시아관의 개설이다. ‘아시아’라는 말처럼 가깝고도 먼 단어가 있을까. 예술사를 배워도 언제나 서양의 초점에 맞춰 배워온 세대라서, 그만큼 아시아는 아련하고 막연하기만 하다. 사실, 아시아는 고사하고 ‘우리’ 에 대한 내용도 무지라면 무지인 상태이고, 사회에서 활동하면서 두고두고 억울하고 분한(?) 것이 이에 대한 아무런 동기부여도 받아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지금이라도 늦은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내게 ‘아시아’는 베일에 싸인, 그렇다고 신비롭지도 않은 주변의 어떤 것으로 맴돌고 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눈에, 귀에 띄이기만 하면 접하고 보는 아이템이 아시아문화인데, 아시아관을 새롭게 신설, 상설전시를 진행중이라니 반갑게 달려가게 되었다.

인도네시아 방만 둘러보는데 하루가 가버려

규모로 봐서는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대형인 박물관은 평일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고 있었다. 몇 가지 궁금한 것을 뒤로하고 곧바로 3층 아시아관으로 올라갔다. 아시아관은 인도네시아실, 중앙아시아실, 중국실, 신안해저문화재실, 낙랑유적출토품실, 일본실등 6개로 나뉘어 구성되어 있는데, 한 항목 당 한 방을 배려했다. 첫 번째 방이 인도네시아방. 이 방을 들어가기 전에는 대략 한두 시간이면 주욱 둘러보고 나오려니 하고 가볍게 들어갔는데, 이 날은 인도네시아 방만 둘러보는데 시간이 다 가버렸다. 아무래도 불교문화와 힌두 신화가 영향을 준 터라 등장하는 유물들의 이름은 왜 이리 엄청나게 모르는 단어들인지… 아무리 읽어도 입에 붙지 않고, 이름 하나를 몇 번에 끊어 읽어야만 했다. 서양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수십가지가 되도 그냥 줄줄 나오는 형편에, 한 캐릭터의 이름 하나만 가지고 몇 번을 나눠읽고 그래도 한번에 조망이 되지 않아 머뭇거리게 되니 내 정신의 현주소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불상이 나오는 대목은 친근감을 느끼면서도 별자리 북과 어려운 이름의 신들이 등장하면 먼먼 이야기 같고. ‘동일자와 타자’가 온통 뒤섞여 버린 곳에서 심리적·감각적 타격을 입으며 돌아보는 자리는 인터넷 속 어느 VR1) 속으로 내가 끼어든 느낌이 들었다.

지도를 보면 콩을 쏟아놓은 것처럼 지저분하게(?) 점들로 이루어진 나라가 인도네시아이다. 영토로 하나의 공동체인‘우리’를 이해하던 어린 나이에 인도네시아 지도를 보면 왠지 나라 같지도 않은 것이 일관적이지도 않을 것 같고 해서 이미 시각적으로 은근히 한자락 깔고 보던 이미지가 내겐 전부였으니 그 곳의 문화와 역사, 예술 등이 내 가슴으로 들어 올리 없었다. 그 곳의 다양성과 이질성이 우리의 지평을 얼마나 넓혀줄 것인가에 대한 아무런 호기심도 없이. 지중해 그리스도 섬나라인데, 어째서 인문학의 정통으로 한치의 의심도 없이 매끈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 참 터무니없다. 인도네시아는 자바(Java), 칼리만탄(Kalimantan), 수마트라(Sumatra), 술라웨시(Sulawesi), 이리안 자야(Iran-Jaya) 등 5개의 주요 섬과 함께 무려 17,000여개의 작은 섬들로 구성된 세계에서 가장 큰 섬나라라고 한다. 한 방으로 이 문화를 모두 설명해내기란 불가능한 일이지만, 문(門)하나를 열게 해줄 단서들이라는 측면에서는 한 방도 넓기만 하다.

청동북 앞에 서다

전시실의 구성은 먼저 인도네시아의 역사적 흐름을 이해할 수 있도록 시대별 대표문화재를 전시하였으며, 이어 힌두교와 불교등 종교관련 문화재의 전시를 통해 고대 인도네시아인이 지녔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게 하였다. 인도네시아인들의 미감을 느껴볼 수 있도록 전통공예품인 크리스와 바틱 등도 전시되어 있었다. 여러 가지가 나의 눈과 마음을 붙들었지만, 그 중에서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청동북 앞에서니 이 북의 주인, 샤먼이 인간의 구제를 위해 제를 올리는 현장에 불려가는 것 같았다. 이것을 현지에서는 ‘마칼라마우(Makalamau)’ 라고 부르는데, ‘마칼라마우(Makalamau)’ 는 큰 밥공기를 의미한다고 한다. 북의 가장자리에는 12별자리가 선각되어 있고, 원이 사등분되는 귀퉁이에는 개구리가 네 마리 올라와 있다. 우주를 통째로 담아낼 것 같은 별자리와 개구리가 함께 있다니… 청동시대 인도네시아에는 지상의 대표주자가 개구리였단 말인가… 간단한 설명문에는 이 북이 기우제에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기우제라고 하니 농사에 관련한 것일 테고, 비를 구하는 제사이니 당연히 개구리가 등장한 것인가…. 비를 구하는 것은 농사를 지었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인간을 위한 제사라고 할 수도 있지만, 시대를 지나 덜렁 북만을 대면하고 있는 나에게는 아무래도 대표주자가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북에 관여하는 자는‘샤먼’일테니 더 이상 종(種)으로서의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곤란하고, 어쨌든 청동시대 인간은 전 생명체 중의 하나일 뿐이고, 이속에서 구제의 대상이었을 것이라는 것만이 추정될 뿐이다. 더욱이 개구리의 힘을 빌어오는… 아무튼 문화의 근거를 모르다보니 나의 해석은 이 정도에서 그치고 만다.

둥둥둥, 샤먼의 북소리

모든 문화는 그 문화의 통합논리가 있고, 그 논리를 유포하는 코드가 있으니 더 나은 문화도 더 나쁜 문화도 없다는 어느 인류학자의 말처럼, 북에서 만난 ‘개구리와 12별자리’ 의 통합은 인도네시아 정신의 한 켠을 담고 있으리란 짐작만 할 뿐이다. 다만, 청동북을 보면서 청동시대 샤먼이 기도했던 인간구제(어쩌면 인간을 넘어선 모든 것도 포함하여)가 이 시대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실해졌다. 기계시대를 거치면서 분해되고 쪼개진, 또 지금은 인터넷의 그믈망으로 사라지기까지 하는 ‘우리’ 를 위해 샤먼이 이 북을 한 번 더 쳐 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샤먼의 북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개구리에게, 바람에게, 나무에게 도와달라고 간청해야 할 것이다.

1) 버철 리얼리티(virtual reality) – 실제의 공간과 똑같은 느낌이 나도록 촬영해 놓은 디지털 영상

글. 남인숙 (편집위원 innsuk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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