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 김봉두’가 ‘선생님’이 되어야 하는 이유

촌지 파동 – ‘선생 김봉두’가 ‘선생님’이 되어야 하는 이유

‘선생’에서 ‘선생님’으로 개과천선한 사람이 있다. 바로 ‘선생 김봉두‘이다. 촌지를 너무 밝히다 시골분교로 발령난 ’선생‘은 순박한 시골마을에서도 제 버릇 개 못주고 촌지 해프닝을 벌인다. 아이들 손에 일일이 ’하얀봉투‘를 들려 보내기도 하지만, 고대하던 촌지대신 반갑지도 않은 아이들 편지만 들어있다. 더덕 한뿌리, 가시오가피 한묶음, 배추다발을 촌지대신 받아야 하는 서러운 시골교사생활을 청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선생‘ 김봉두. 결국 시골아이들의 순박함에 감화되어 기꺼이 ’선생님‘ 으로 부활한다.

‘선생 김봉두’는 웃길 작정하고 만든 ‘차승원표’ 코미디 영화이다. 근데, 심하게 오버액션하며  촌지를 받아챙기는 영화의 초반부가 재밌다기 보다는 씁쓸하고 개운치 않다. 영화의 ‘코믹 코드’가 일선 교육현장의 ‘리얼리티 코드’와 오버랩 된 탓일 게다. 촌지가 오고가는 교육현실은 웃고 넘어가기에는 너무나 심각한 문제이니 말이다. ‘촌지교사’가 ‘세태풍자 코미디 영화’의 주인공으로 당당히 등극했다는 것은, 교육현장에서의 촌지거래가 우리 사회의 부인할 수 없는 ‘세태’임을 반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교육현장에서의 촌지거래    

코믹드라마와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코믹드라마보다 더 코믹하며 드라마틱한 상황이 교육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학교에서의 촌지 거래 현장을 잡기위해 서울시 교육청이 007 작전을 방불케하는 암행감찰을 했다고 한다. 감찰 공무원이 학부모나 수선공으로 변장한 후 학교에 잠입, 촌지수수 현장을 급습한 후 증거를 사진으로 남겼단다. 대부분의 ‘하얀봉투’는 책갈피나 떡, 케이크 상자 속에 숨겨져 있었다고 한다. 실로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그리고 적발하는 사람 모두 스파이 영화에 버금가는 스릴을 만끽했을 법 하다. 해당 교육청이 촌지수수에 대한 특별감찰을 벌일 것을 미리 알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촌지가 버젓이 오고 갔다니, ‘적발된 촌지’는 말그대로 빙산의 일각일 지도 모른다.

여러해 전, 언론매체가 ‘촌지근절 캠페인’을 벌인적이 있었다. 받은 촌지 액수와 예상 모금액을 적어 놓은 모 여교사의 장부가 매스컴에 오르내리며 사람들의 중추신경을 자극하고 있었고, 언론이 기세등등하게 학교 촌지문제 근절을 위해 총대메고 나설 때였다. 그때 촌지 관련 기사를 썼던 모 일간지의 기자는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의 담임에게 ‘결국’ 촌지를 건네고야 말았다던가. ‘코믹’이 맞긴한데 그리 우습지 많은 않다. 우습기는커녕 허탈하다.

촌지는 뒷거래를 취한 뇌물

때는 바야흐로 신학기를 갓 넘어 스승의 날이 코앞에 있다.
해마다 신학기가 되면 자식사랑이 차고 넘치는 엄마들의 치맛바람이 교실문턱을 넘나들기 마련이다. 아이의 담임교사가 촌지를 원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교사 품평회부터, 촌지 수수의 가장 좋은 방법과 적절한 액수 까지 온갖 정보(?)들이 학부모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이때쯤이다. 도대체 왜 학부모들은 자발적으로 나서서 주지못해 안달인 것일까 ? 촌지의 사전적 의미 그대로, ‘고마운 마음을 담은 작은 정성’을 아이의 스승에게 전하기 위해서?  하지만 아무리 미사여구로 포장해도 촌지는 ‘뇌물’ 이다. 교사면전에서 “ 여기 촌지 있으니 잘 쓰십시오.” 라고 당당히 건네는 사람은 없다. 은밀히, 몰래, 슬쩍, 뒷거래하듯이 주는 것이 바로 촌지이다(오죽하면 촌지의 다른 이름이 검은 돈, 뒷돈, 심지어 쥐약일까). 촌지는 뒷거래를 위한 뇌물이다. 그리고 무릇 뇌물이란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댓가’를 전제로 한다. 학교 촌지의 대가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마디로 “내 아이 잘봐달라.”일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교사가 하는 일에 대한 고마움은 국민의 세금으로 합당하게 지급되고 있다. 학부모들이 개별적으로 은밀하게 ‘고마움에 대한 성의를 표시해야’ 할 필요는 없을뿐더러 해서도 안된다.

촌지를 받는 교사들(일부 교사들)의 유일하며 한결같은 ‘변명’은 ‘주는데 어떻게 안 받느냐’ 이다. 촌지를 받는 교사들의 변명대로라면 촌지 근절은 간단하다. 학부모가 갖다 바치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다시말해 ‘내 애 특별히 편애해 달라’는 지극히 이기적인 부모들 심보만 고쳐먹으면 된다는 얘기다. 이렇게 간단한 문제인데, 왜 촌지는 법적 감시망과 도덕적 비난에도 불구하고 근절은 커녕 줄어들 기미도 보이지 않는 것일까. 결국 촌지는 어느 한쪽의 일방통행이 아니라 두 집단의 이해관계가 적절히 맞물려 돌아가는 부패의 고리라는 데 문제가 있다. 주는 쪽은 ‘내 아이 잘봐달라’ 는 무언의 주문을 하고 있고, 받는 쪽은 ‘정성에 보답하겠다’는 암묵적인 동의를 하고 있는 명백한 뒷거래이다. 교사나 학부모 어느 한쪽도 도덕적인 지탄과 법적 처벌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이다.

참교육으로 가는 지름길
다시 영화이야기로 되돌아간다. ‘선생 김봉두’는 분기탱천한 학부모의 교무실 난동으로 시골학교로 전근되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현실에서는 기대하기 힘들다. 학부모나 학생이 개인적으로 문제제기하기에는 교육계의 비리는 너무 거대하며, 대다수 학부모들은 그렇게 ‘무식하게’ 용감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촌지문제는 정의로운 학부모가 나서서 돌을 던질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부정부패 척결’ 이라는 법적인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 촌지를 주는 쪽과 촌지를 받는 쪽이 똑같이 처벌대상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뇌물공여’와 ‘뇌물수수’는 명백한 범죄행위이므로.

‘선생 김봉두’에서 ‘참교육’이라는 붓글씨는 세 번쯤 스크린에 잡혔다. 앞서 두 번의 ‘참교육’은 씁쓸하기 짝이 없었지만, ‘선생 김봉두’가 ‘선생님 김봉두’로 부활한 이후 등장한 ‘참교육’은 짜릿할만큼 감동적이었다. ‘선생 김봉두’가 ‘선생님 김봉두’로 부활해야할 이유는, 바로 그것이 ‘참교육’으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뒷거래를 일삼는 부모와 교사에게서 참교육을 기대할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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