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미워한 TK ‘그 악연의 끝에서’-김용락회원

김용락운영위원께서 평화뉴스에 쓰신 글입니다. 옮겨 싣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8월 18일(2009년) 오후 1시 43분에 서거 했다. 삼가 명복을 빈다.

그의 죽음을 두고 국내외 언론이 전하는 것처럼 그는 명암이 뚜렷한 ‘큰 정치인’이었다.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과 남북 화해에 특히 큰 업적을 남겼다. ‘인동초’ ‘행동하는 양심’ ‘행동하는 욕심’ 등은 그에 대한 평가의 일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표현들이다. 어떤 정치지도자에게도 공과功過는 있기 마련이고, 그 일반적인 법칙이 그라고 해서 특별히 비껴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그것을 논하기에는 적절치 않다.

김대중 대통령은 경상도, 특히 대구·경북과는 악연의 관계였다. 이 지역 출신인 박정희, 전두환 두 대통령으로부터는 박해받는 약자의 위치에 있었다. 그러면서 현재 최대의 망국병이라 불리는 지역감정의 피해자이기도 했고, 또 다른 의미에서는 최대의 수혜자라는 혐의를 받기도 했다. 대구·경북의 일반인들에게 김대중은 끝없는 미움의 대상이었다. 그 미움은 그의 죽음이 발표된 날 오후 내가 방문했던 한 대구시내 한 서민 만두집에서도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시민들은 TV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죽음 소식을 접하면서 “진작 죽지, 왜 이제 죽냐” “벌써 죽노?(더 고생하다 죽지…)”와 같은 빈정거림 일색이었다.

이런 미움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김대중 대통령이 퇴임하고 난 후 대구·경북에서 가장 많이 나돈 시민들의 말은 “김대중이가 돈을 천문학적으로 많이 챙겨서 숨겨놓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후임자가 후련하게 파헤쳐 그를 감옥에 보내지 않은 것에 대해 애석해 하는 것이 주류적인 분위기였다. 가끔씩 김대중을 이해하고 옹호하는 시민들도 있었지만 그건 극소수에 불과했다.

김대중을 빨갱이쯤으로 여기고, 벌레 보듯 하는 대구 시민들이 근본적으로 나쁜 인간이거나, 특정한 타인에 대해서건 무작정 적대감을 갖도록 태어난 인간은 애초 아닐 것이다. 무엇인가 원인이 있고, 별 정치의식이 없는 소위 필부필녀 들에게 그런 의식을 갖도록 만든 이데올로기적인 원천이 있을 것이다. 이 지역 시민들의 이런 멘탈리티(정신상태)를 밝혀내는 것이 대구·경북을 이해하는 한 방법이 되기도 하겠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망국병이라 불리는 지역감정을 해소하는 데도 어떤 해답이 될 것이다.

그러면 경북에서 태어나 청년기부터 40년 가까이를 대구에서만 살아온 전형적인 경상도 사람인 나에게 김대중이란 정치인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김대중에 대한 열렬지지자가 아니다. 그가 만든 정당이나 정치단체에 가입하거나 가까이 한 적도 물론 없다. 어떤 직접적인 사적 관계도 없다. 그러나 보통의 경상도 사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김대중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사람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에 대해 편견을 갖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고 할 수 있는 정도이다.

김대중 대통령을 가까이 한 적은 없지만, 그와 관련한 일화는 여럿 있다. 1987년 양 김 단일화 실패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후보가 맞선 대통령 선거에서 군부 세력인 노태우가 당선했다. 당시 나는 김영삼 쪽으로 기운 ‘후보단일화론’과 김대중 쪽으로 기운 ‘비판적 지지론’ 가운데서 정서적으로 후보단일화 쪽에 더 마음이 가 있었다. 그 이유에 정치의식이나 논리적인 근거는 없었고, 있었다면 나 역시 경상도 출신이라는 사실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애매한 상태였다. 그 해 나는 취재를 핑계로 아무에게도 투표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에는 단일화에 실패한 양 김에 대한 분노가 있었다.

이후 3당 합당 후 1992년 14대 대선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이 대선에서 격돌했을 때 나는 경북일보 정치부 기자로 일선에서 그 선거를 취재했다. 내가 취재하다가 좀 늦게 편집국에 들어가면 박 아무개라는 정치부장이 비꼬는 듯, 놀리는 듯 “야 김 기자, 너 취재 안 하고 김대중 선거운동하고 왔지?” 하면서 김대중과 나를 연결 지어서 의심하곤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절치부심한 끝에 1997년 대선에서 승리하고 1998년 2월 25일 대통령에 취임한다. 그로부터 정확히 1년 후인 1999년 2월에 나는 당시 10년 가까이 시간강사로 있던 계명대에서 쫓겨났다. 담당 학과 주임교수가 직접 총장을 면담해 개강 1주일을 앞두고 내보내면 후임 인선이 어렵다고, 굳이 해직해야 한다면 한 학기 연기해줄 것까지 요청했지만 거부되었다. 해직 사유는 학생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친다는 애매한 이유였다. 그때 내 스승이 “전두환, 노태우 때도 별 문제없이 강의 했는데, 민주정부라는 김대중 정권에서 쫓겨나다니 말이 되나?”라고 외치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거리는 듯하다. (이 사건은 나중에 내가 여러 경로를 통해 알게 된 것이지만 국정원에서 나의 정치적인 입장이나 행동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고, 겁먹은 학교에서 알아서 나를 자른 것이었다. 이 문제로 나를 면담했던 당시 학원 담당 대구 국정원 직원이 현재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되어 있다).

그 무렵 김대중이 만든 평민당 소속 광주일고 출신의 국회의원 한 사람이 대구에 와서 우연히 내가 합석한 일이 있었다. 그 의원과 선배 교수, 나 이렇게 셋이서 새벽까지 술을 마시게 되었는데 화제가 궁하게 되어 슬그머니 내가 학교에서 쫓겨나게 된 저간의 사정까지 술안줏감으로 오르게 되었다. 그러자 그 국회의원이 정색을 하고 자세를 고쳐 앉더니 내게 김대중 정부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서 너무 미안하다. 광주 출신인 자신이 대신 용서를 구하겠다. 내일 오전 서울서 국정원 기조실장인가를 만나면 이 문제를 반드시 언급하고 해결책을 구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최초로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룩했다던 민주정부 아래서 지방 대학 일개 시간강사가 수긍할 수 없는 이유로 쫓겨나는 사태를 직접 겪으면서 대통령 한 명이 바뀐다고 해서 당장 ‘이상 국가’가 오는 것은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절감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부당한 권력의 횡포에 대해 분노가 끌어 올랐다.

사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후 공·사적으로 나는 광주를 여러 차례 방문했다. 행사에 초대받아 광주를 위로하는 시도 낭송했고, 광주의 입장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경상도 사람으로 나 만큼 광주를 많이 간 사람도 흔치는 않을 것이고 광주 친구가 많은 사람도 드물 것이다. 당연히 왜곡된 지역감정의 폐해나 위험성에 대해 나 만큼 절감하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가시면서 이것만은 꼭 가져갔으면 좋겠다.

나는 개인적으로 김대중 대통령을 존경한다. 한 인간으로서 고난과 역경을 헤치고 그가 이룬 업적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그가 대통령직에 있을 때나 전직 대통령으로 있을 때 보여준 민주주의와 평화에 대한 신념이나 ‘전직’ 다운 의연한 처신에 대해서도 박수를 보낸다. 최근 한 시사 잡지의 인터뷰에서 백낙청 교수는 김대중 대통령이 좀 더 살아계셔야 되는 이유에 대해, 한반도가 여러 어려움에 처해있는 현실에서 그가 발언했을 때 세계적인 영향력 있는 국내 거의 유일한 인물이 김대중 대통령이라는 기사를 보고 공감한 바가 컸다.

그러나 이제 그 분은 갔다. 죽음은 인간이라면 피 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의 죽음을 앞에 두고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라는 문제는 이제 전적으로 살아남은 자의 몫이 됐다. 다시 한 번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빈다.

[김용락 칼럼 29] 김용락 / 시인. 경북외국어대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daegusc@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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