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분업 시대와 소비자 주권’ 조병희 교수 발제문

의료

의약분업 시대와 소비자 주권
조 병 희(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보건사회학 교수)

1. 의사파업이 소비자에게 미친 영향

첫째, 의사파업은 진료의 공백을 가져왔다. 지난 6월 하순부터 약 4개월간에 걸쳐 때로는 모든 의료기관이 문을 닫거나 때로는 외래진료가 중단되거나 하면서 환자들은 대안이 없는 진료공백 상태에 처했다. 이 과정에서 장기투병 환자와 응급환자의 고통이 특히 심했다. 암환자와 같이 지속적인 치료를 요하는 집단이나 여타의 만성질환으로 검사와 수술 등을 예정하고 있는 환자들이 계속 뒤로 밀리게 됨으로써 공포감을 갖게 되었다. 고혈압이나 당뇨 등 장기투약 환자들도 처방전을 얻기 위하여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응급환자들 은 응급실의 인력부족으로 그리고 진료진의 피로누적으로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받기가 어려웠다.

둘째, 의사파업은 의료진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게 만들었다. 의사파업 이전에도 한국사회에서 의사에 대한 신뢰도는 그다지 높지 않았었다. 의사와 환자간에는 상당한 불만과 불신이 존재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의사와 환자간의 언쟁이나 소송과 같은 명시적인 갈등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지만 보다 일반적인 양상은 ‘제도화되고 내면화된 무력감’이었다. 소비자나 환자들을 면담해 보면 그들이 의료계에 대하여 가지는 불만은 많지만 정작 이것이 의료현장에서 의료진에게 표현되는 경우는 드물다. 이번 파업 사태에서도 사회적으로는 매우 열띤 공방이 진행되었지만 정작 일반 소비자나 시민들의 의사파업에 대한 ‘조직화된 분노’는 표현되지 않았다. 그것은 의료기관이란 성(城)을 구축해 놓고 마치 제왕과도 같은 권위주의적인 태도로 환자를 진료해 온 의사들에게 환자들은 주눅이 들어 있었고 그들의 권력에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약자로서 그들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해 있었던 것이 바로 소비자와 환자들이었다. 의사들의 태도나 서비스의 수준이 불만스럽다고 하여도 환자들은 최소한 원할 때 진료를 받을 수는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질병이라는 것이 항시적인 것이 아니고 예외적으로 찾아오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질병치료 과정에서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환자들은 불만을 접고 의사에게 의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장시간 지속된 의사파업은 환자가 갖고 있던 최소한의 신뢰마저 상실하게 만들었다.

셋째, 의사파업은 의료와 사회의 관계를 재정립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의료는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존재하는 섬과 같은 것이었다. 의료가 생명을 다루는 중요한 사회적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에서는 의료문제는 보건의료 전문가들만의 문제로 인식되어 왔고 또 사회문제로서보다는 의학기술적인 문제의 영역으로 간주되어 왔다. 따라서 일반적인 정치나 경제부문, 사회복지나 환경부문에서는 비교적 소비자 시민운동이 일찍 발전되어 왔으나 의료부문의 소비자 운동은 의료사고와 관련한 소비자 운동 같이 극히 제한적으로만 존재하였다. 그런데 의사파업이라는 국민의 건강권 확보에 정면으로 대립되는 사태가 발생함으로써 이것은 역설적으로 의료부문에서 소비자 운동의 필요성과 시급성을 인식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조병희 교수 발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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