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무엇을 그리워하는가!

정희성 시집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문득 그런 때가 있다. 어릴 적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듣던 먼 옛날 슬픈 전설처럼, 살아온 날들이 마냥 아득해지고, 가슴 먹먹해지는 그런 때가 있다. 그런 날이면 뒤돌아서 가는 사람들의 등에 눈이 시리다. 그런날이면 누구의 가슴엔들 박힌 못이 없으랴. 여태 무심히 봐오던 사람들의 박힌 못이 보이는 듯도 하고 낮고 깊은 숨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저마다 어떻게 견디며 여기까지 살아들왔는지, 어쩌자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하며 그 속앓이들을 묻으며 왔는지……. 봄이건만 아직 강퍅한 바람이 불어대는 날. 이 땅의 생명 있는 모든 삶들이 눈물겹게 서러운 그런 날이 있다. 어두운 극장에서 공포에 질려 으악으악 소리를 질러대다 그 진저리를 다 떨치지도 못한 채 나선 극장 앞에서 마주친 환한 햇살처럼, 문득 삶이 낯설어 질 때가 있다. 여직 내가 안다고 믿어왔던 모든 것들이 저만큼 물러나고, 옳은 것이라 확신했던 것들이 내속의 허깨비놀음이 아니었나 싶은 그런 날이 있다. 그렇게 무지(無知)가 사무치는 날이면 설령 생명부지의 사람일지라도 기껍고 뜨거운 마음으로 낮술 한잔 나누며 부박한 삶의 한 자락을 서로 위로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취할 수 있을 것 같다. 익숙해져 더 이상 새로운 것이 보이지 않는 내 사시의 눈을 가만히 내려 감으면 모든 낯선 것들이 경계를 허물며 내 안에서 싹을 틔우는 그런 때가 있다.

“어느날 당신과 내가 / 날과 씨로 만나서 / 하나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하리“
– 1979.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

74년~91년 시인이 세권의 시집을 세월의 행간 어디쯤에 내어 놓을 때 이 땅의 기후는 몹시도 나빴다. 브레히트의 진언처럼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그것이었다. 그때 시는 선언이었고, 결의였고, 저항이며 투쟁이었다. 시 쓰기는 안정된 직장을 포기해야 하는 결단이었고 가족들을 길거리로 나안게 하는 고통이었고, 기어코 목숨조차 내걸어야 하는 천형이었다. 하여 더러는 이땅의 삶보다 쉽게 써지는 시를 스스로 저주하여 절필의 유배지로 떠나는 결곡함을 택하였고 더러는 글보다 붉은 띠를 머리에 두르고 시보다 구호를 외치기도 했었다. 그러나 어쩌랴. 詩人이란 어쩌면 모반과 탈주의 정신을 핏속에 타고난 존재인 것을. 아. 그러나 어쩌랴. 詩人은 봄날 돋은 새순처럼 여리디 여린 심성을 타고난 존재인 것을. 시인의 천성과 불협화음하는 시대의 복판에서 그들은 물음하고 절규한다.

“ 이 참담한 시대에/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한다 / 살아남기 위하여 죽어있는 나의 영혼 / 싸움도 사랑도 아닌 나의 일상이 지금 마포강변에 떨어져 누구의 발길에 채이고 있을까 / 단한번, 빛나는 사랑을 위해 / 아아 가뭇없이 사라지는 / 저 눈물겨운 눈발. 눈발. 눈발. “
– 1987. 눈보라속에서 –

시인은 이 참담한 시대의 강을 건너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기다리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그리워한다. 그 기다림이 무언지 그 그리움이 어디를 향한 것인지 우리는 시인의 시속에서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것은 인간의 영원함 꿈인 자유과 민주, 평등을 향한 것임을. 그리고 그것들은 안온한 삶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핍박받고, 고통당하고, 싸우는 삶 속에 있음을. 그런데 그렇게 오래 기다리며 그리워하며 살기는 쉽지 않나보다. 고백컨대 나는 사기꾼인가보다. 그리 오래 무엇을 기다려 본적이 없다. 기다리는 척하다 쉽게 지친다. 쉽게 돌아선다. 그리 절실히 무엇을 그리워해 본적이 없다. 그리워하는 척 하지만 정작 누구보다 쉽게 일상의 안락에 투항한다. 정녕 오래 기다려 본 사람이라면, 오래 그리워해본 사람이라면, 봄이 되어 꽃이 핀다고 금방 기뻐 웃을 일도 아니요. 가을이 되어 잎이 진다고 산에서 눈길을 쉬이 거둘 일도 아님을 알 것이다.

“무엇을 기다리나. 그 사람. / 동구 밖 장승곁에 서 있네 / 해가 져도 장승처럼 서 있네 / 어둠속에 동그라미 장승이 되었네“
– 2001. 그 사람 –

10여년을 속으로 속으로만 말하다 시인은 네 번째 시집 ‘시를 찾아서’를 우리에게 고백한다. 세상에 입 가진 자들 저마다 떠들어 대는 소리에 기가 질려 말도 잊어버리고, 말하는 재미도 잊어버리고, 마침내 시 쓰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산 시인이 다시 말을 처음 배우는 어린애마냥 서투르게 그 말을 신기해하며, 말 하는 법을 새로 배워야겠다며 그렇게 다시 시를 쓴다.

“삼십년이 넘게 군사독재속에 지내오면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증오하다보니 / 사람꼴도 말이 아니고/이제는 내 자신도 미워져서/무엇보다 그것이 괴로워 견딜 수 없다고/신부님이 앞에 가서 고백했더니/신부님이 집에가서 주기도문 열 번을 외우라고 했다./그래서 나는 어린애 같은 마음이 되어/그냥 그대로 했다.”
2001. 첫고백

나는 다시 시를 읽는다. 무수하게 말늘이기에 바쁜 시대에, 말 줄이기 작업인 시를 읽으며 내 안의 구구한 변명과, 내 안의 누추한 상념들을 걸러내고 줄여본다. 그러다보면 혹 행운처럼 오롯이 그리운 것을 그리워하며 살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꿈꾸며…….

글. 김말선 부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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