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형수술 권하는 사회

“ 제 얼굴은 아주 못생겼어요. 그래도 절 사랑할 수 있나요 ?”
“ 물론이죠. 아름다움은 외모가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니까요.”
스페인 영화 ‘ 어글리 우먼’에 나오는 대사이다. 이 대사가 오가는 장면에서 일시 호흡이 멈췄다. 영화가 중반을 치닫도록 아직 관객에게 공개되지 않은 ‘어글리 우먼’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과 아울러, 예쁘기는커녕 추할 것이 분명한 얼굴을 대면한 이후 나타날 남자의 후속 반응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망설임 끝에 가면을 벗어던진 여자, 때맞춰 터진 불꽃놀이 축포의 여명아래에서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남자는 입덧하는 임산부 무색할 지경으로 토악질을 해댄다. 어떠한 미사여구로 아름다움의 실체를 포장하더라도, 결국 여성의 아름다움이란 마음이 아니라 겉모습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확인하는 ‘뼈아픈’ 순간이다. 아, 몰지각한 대다수 남성들이여, 제발 입에 침이라도 바르고 거짓말을 하라 !

외모 콤플렉스

얼굴이야 나름대로 개성있게 생겼다고 자부한다. 아무리 보편적 미의 잣대를 들이대며 “넌 평균치 미달이야”라고 윽박질러도 기죽지 않을 자신이 있다 이 말이다. 어차피 눈 두 개에  코하나 입하나 달고 사는 건 다를 바 없고, 이목구비의 크기나 서로 배치된 비례의 섬세한 차이가 미와 추를 분리하는 기준이 아닌가. 아주 오래전 사춘기시절, 친구와 같이 브룩 쉴즈 라는 당대의 미녀배우 사진을 들고서 도대체 이 여자와 우리가 어디가 어떻게 다른가를 꼼꼼히 비교분석했던 적이 있었더랬다. 거울 속 내 얼굴과 여배우 사진을 번갈아 본 결과, 얼굴이 별로 다르지 않다는 썩 놀랄만한 결론을 도출한 바 있다. 눈 코 입의 그 미세한 차이는 사춘기 소녀의 눈에 정말 별것 아니었으니 말이다.
외모로 인해 결정적인 쇼크를 받은 것은 몸도 마음도 이미 다 커버린 대학시절이었다. 모 교수의 강의실, 국문학과 교수였던 이 분이 첫 강의시간에 던진 말은 이것이었다. “ 교문 앞에서 시위하는 여자 애들은 하나같이 못생기고 키 작은 애들이야. 걔네들은 외모 콤플렉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시위 같은 거나 하는 거지”
나름대로 개성 있게 생긴 얼굴이야 누가 뭐라 할 수 없지만, 반올림해서 153 센티가 될까 말까한 객관적 수치로 드러나는 키는 무의식속에 잠재된 ‘상처’쯤 되었었나 보다. 융이라는 분석심리학자가 그랬다던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부분이 콤플렉스라고. 융의 말대로라면 내 무의식속에 잠재되어 있던 외모 콤플렉스가 예민하게 반응하며 폭발 했고, 난 그날 이후 수강신청 철회를 해버렸다. 아, 20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열 받는다. 인간의, 특히 여성의 외모에 대한 이 사회적 편견과 억압은 언제쯤이면 해소될 수 있을까 ?

외모가 경쟁력인 사회

대통령도 쌍꺼풀 수술하고 보톡스로 얼굴주름 없애는 판이다. 중국에서는 ‘인조인간’이라 불리는 성형미인들만 출전하는 미인대회가 성행하고 있고, 우리나라 연예인들은 숨김없이 당당하게 뜯어 고친 부위를 밝힌다. 문자 그대로 ‘살을 도려내고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하고라도 외모개선을 통해 사회적 경쟁력을 갖추겠다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남자든 여자든 잘생기고 예쁘다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우선 호감이 가는 것은 당연지사다. 문제는 외모가 주는 선입견이 단지 호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결정적인 조건으로 작용할 수 도 있다는 점이다. 아나운서가 되기 위해서는 발성법이나 표준어 구사능력보다 일단 ‘얼굴이 되어야’한다는 것이 방송계의 불문율이고, ‘용모단정’은 업무내용과 무관하게 입사지원서의 필수자격요건이 되고 있다. 티비와 라디오를 넘나들며 왕성하게 활동하던 중견 여성 아나운서가 최근 다이어트에 성공해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환골탈태에 가까운 변신에 감탄하면서도 왠지 씁쓸하다. 나잇살을 당당하게 드러내며 ‘예쁜 여자 아나운서’의 범주에 끼지 않는 방송인으로 남았더라면 더 멋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외국어에 능통한 뚱뚱하고 배나온 중년여성이 스튜어디스를 하고 머리 희끗한 노련한 여성 앵커가 뉴스진행을 하는 일은 정녕 불가능하단 말인가 ?

외모, 그 새로운 차별

루키즘( lookism ). 사전적인 정의를 하자면 ‘외모에 대한 편견 혹은 차별’을 뜻하니 한마디로 ‘외모 지상주의’를 일컫는다. 인류역사상 인간을 분류하고 차별하는 기준이 되어왔던 ‘인종, 성별, 종교, 이념’에 이어서 이젠 ‘외모’까지 인간을 차별하는 새로운 요소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인종이나 성별과 달리 얼굴 생김새는 현대 의학의 발전에 힘입어 태생적 한계가 아니라 개선 가능한 영역이 된지 오래다. 외모가 개인의 우열과 인생의 성패를 가르는 한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믿고 집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으니, 수술을 해서라도 차별의 우위를 점하려는 사람이 생기는 것은 당연할 밖에. 뭉칫돈 들여서라도 외모개선하고 팔자 고치겠다는 사람 마음을 굳이 이해하자고 들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사회의 몸에 대한 관심은 도를 넘어선 듯 보인다. 몸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이 자신을 관리하고 표현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전 국민의 몸 상품화’의 단계에 이르고 있으니 집단적 병리현상이라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따져서 유전자의 숙주에 불과한 ‘몸’이 인간을 차별하는 기준이 된다고 생각해 보라. 만물의 영장이라 주장하는 인간의 영혼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원시적이며 폭력적이지 않은가. 차별의 기제에 맞서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차별자체를 없애는 것. 성형수술 권하는 사회를 성형수술하고 싶다.

글. 허경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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