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와 나눔

세상에 소유 아닌 것이 무엇 있으랴! 사랑도 소유의 다른 이름일 바에야 무소유 보다는 어떤 소유를 욕망하는지의 문제일 뿐이다. 사랑과 무소유를 주장한 예수와 부처의 가르침이  개인의 깨달음과 반성에 머무르는 한 사회의 변화를 통해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실천가들과는 어쩌면 영원한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지 모른다. 개인적 수양과 사회적 실천의 통일이야 말로 진정 우리가 가져야 할 기본적 자세이다. 행복은 욕망에 대한 성취도이다. 그렇다면 행복은 더 많은 욕망을 성취하거나 욕망을 최소화시킴으로써 가능하다.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는가?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이 쓰이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 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여 있다는 것’이므로 소유하지 말라는 법정의 무소유 철학은 물질적 부만을 추구하는 우리들에게 유한한 경고이다.

몇 년 전, 미국의 3조에 가까운 돈을 자선 단체에 기부한 사업가 노인은 ‘누구도 한번에 두 켤레의 구두를 신을 수 없다’는 의미 있는 말을 던졌다. 가난하게 살라는 것이 이 척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너무 많은 것을 갖고 싶어 하는 우리의 일그러진 욕망은 제어되어야 한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그 사막 한가운데에 보이지 않는 사막에 들어가기 전에는 보이지 않는 소중한 우물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이 아름다운 건, 누군가와 더불어 살고 나누어 사는 것에 있다. 더불어 살아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아름다움이 있어 가난한 이들의 아픔을 외면하고 스스로 나누지 않으면서 평등을 실천하는 것이 가능할까? 왜 많은 종교 지도자와 혁명가들은 권력만 잡으면 스스로 부패해 가는지.  권력의 속성이 그렇다 말하지 말자. 초심을 잃어버리고 버린 자가 스스로 평등주의자인 나는 얼마만큼 나누며 살고 있는가. 지금 나누지 않고서 나중에 세상을 바꾸어서 나눌 수 있을까. 오늘 나누지 않으면 내일의 나눔은 없다. 무소유가 불가능 하다면 나누고 또 나누자.  법정의 무소유의 진정한 의미는 나눔에 있지 않을까.

글. 박근식 (편집위원 myid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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