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범이라는 이유로?”

“강간당한 여성을 사형에 처하다니 !”

영화 <몬스터>에서 일급살인죄로 사형선고를 받은 여성의 마지막 절규이다. 여덟 살 때 아버지의 친구에게서 성폭행을 당한 여자, 생계를 위해 거리의 여자가 된 주인공(세를리언 테즈)은 강간을 당한 후 무려 6명의 남자를 연쇄 살인한다. <몬스터>는 일급살인죄로 사형을 당한 미국의 실존인물인 ‘에일린 워노스’의 실화를 다룬 영화이다. ‘실화’가 주는 압박 때문인지, 파국을 향해 치닫는 영화를 불편한 심기로 보다 보면 고개를 드는 의문이 있다. 무엇이 ‘괴물’인가? 여성을 성적 욕구의 배출구로 여기는 남성인가?  ‘단지 강간을 당했다는 이유만으로’ 서슴없이 총을 난사하는 여성인가? 아니면 강간당한 여성의 심리적 외상을 정상참작하지 않는 비정한 사회적 통념과 법제도인가?

“대한민국이 강간공화국이야 ?”

<살인의 추억>에서 좌충우돌 막가파 형사인 송강호가 이단옆차기와 함께 날리는 멘트가 예사롭지 않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나라는 ‘강간공화국’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 성폭력 사건의 발생건수가 세계 1,2위를 다툰다. 성범죄자의 신상을 공개한다는 정부의 단속의지가 무색하게 성폭력 발생건수는 해마다 갱신을 거듭하고 있다.

경찰 통계에 따르면 2004년 발생한 성폭력 사건은 무려 1만 4천여 건, 하루 평균 40명 가까운 여성이 성폭행을 당한다는 말이다. 성범죄 신고건수는 발생건수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고 하니 피해여성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성폭력 피해 여성의 연령대가 점점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피해자의 절반이상이 미성년자이며 그중 13세 이하가 절반을 차지하고, 심지어 6살 이하 어린아이도 14%나 된다고 한다. 성폭행 가해 남성들이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없는 어린아이를 범죄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죄질은 더 흉악하다. 성폭력을 피하는 방법을 숙지하며 여자들이 ‘알아서 몸조심’ 할 것을 주문하기에는 성폭력의 양상이 너무나 교묘하고 잔인해지고 있는 것이다.

성범죄는 피해자에게 치유되기 힘든 심리적 외상을 남긴다는 점에서 여타의 범죄와 구별된다. <몬스터>의 실제 주인공 ‘에일린 워노스’ 같은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종종 성폭행의 상처를 안고 있는 여성들의 끔찍한 ‘복수극’이나 자살사건을 뉴스로 접할 때가 있다. 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도 어린 시절 성폭행 당한 여성이 수 십 년이 지난 후에 가해 남성을  찾아내어 살해한 사건이 있었으며, 최근에는 여대생이 성폭행을 당한 직후 투신자살한 일도 있었다. 성범죄가 피해자에게 남기는 상처가 어떠한 것인지 되돌아보게 하는 대목이다. 물리적인 힘으로 여성의 성을 유린하는 것은 단순히 신체적인 위해를 가하는 것만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격과 영혼을 파괴하는 행위이다.      

“다시는 똑같은 일을 당해도 신고를 하지 않겠다.”

귀가도중 두 명의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한 여성이 우리나라 최고 법정에서 남긴 말이다. 가해남성의 혀를 깨물어 절단했다는 이유로 ‘상해죄’로 도리어 고소를 당했던 이 여성은, 수사현장과 법정에서 ‘여러 번 죽었다’고 토로 한다. 대부분의 성범죄 피해 여성이 피해 사실을 밝히기 꺼리는 이유이다. 피해여성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 현재의 수사관행과 선정적인 언론의 보도행태 하에서는 성범죄 신고 자체가 쉽지 않다. 성범죄 피해 사실을 만천하에 낱낱이 까발릴 용기를 지닌 여성은 많지 않을 것이므로. 성범죄 예방은 물론 신고조차 힘든 현행 제도에 대한 사회적 공분은 크고, 성범죄를 줄이기 위한 제도적 장치마련에 대한 공감대도 형성되어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돌출되어 나온 것이 야당의 ‘전자팔찌’ 발언이다. 한나라당은 상습 성폭행범과 15세 이하 어린이 성추행범에게 위성위치추적장치(GPS)가 있는 전자팔찌를 채우는 법안의 입법을 현재 추진하고 있는데, 사안의 선정성(?)때문인지 찬반양론이 거세게 일고 있다. 찬성하는 입장은 높은 성범죄발생건수와 함께 성범죄의 재범률이 80%에 이른다는 것을 강조한다. 실시간 위치확인과 심박동수가 체크된다는 심리적 압박만으로도 성범죄 발생을 줄일 수 있으며, 만약의 경우 검거가 용이하다는 주장이다. 잡힐 것을 예상하고 범죄를 저지르기는 힘들 것이므로 전자팔찌가 재범률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은 일면타당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전자팔찌에 대한 반대여론도 만만치 않다.

죄의 대가로 이미 형기를 마친 사람에게 다시 ‘족쇄’를 채우는 것은 명백한 이중처벌이며 다른 범죄와의 형평성에도 어긋난다는 주장이다. 무엇보다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성을 침해한다는 도덕적인 비난을 피할 수가 없는데, 전자팔찌가 ‘현대판 주홍글씨’라는 비아냥을 듣는 것도 이 때문이다.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인권만 보호 받을 수 있다 ?”

전자팔찌 논란의 핵심은 ‘인권’이다.  ‘성폭행범의 인권이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가’ 라는 일각의 주장은, 유흥업소 여종업원 성폭행 사건에 대한 판결문으로 인구에 회자되었던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정조만 법의 보호를받을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말과 동어반복이다. 피해자의 인권이 중요하기 때문에 가해자에게 죄형법정주의를 넘어선 제재를 가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그것도 성폭행예정자라는 낙인으로).

피해자의 인권이 중요한 만큼 가해자의 인권에 눈 감을 수 없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범죄예방을 명분으로 성범죄 전과자의 인권침해를 묵인한다면, 앞으로 국가권력에 의한 광범위하고 공공연한 인권침해를 막을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단지 그들이 성폭행범이라는 이유만으로’ 비인간적인 ‘족쇄’를 채울 수는 없다. ‘도덕적 괘씸죄’가 아무리 크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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