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셋 증후군’을 앓는 아이들.

아날로그 세대의 아이들은 ‘슈퍼맨’에 열광했다. 목에 보자기 하나만 두르면 죽지도 다치지도 않는 슈퍼맨이 된다고 철썩 같이 믿었던 아이들. 겁도 없이 보자기 휘날리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다 다치는 사고도 심심찮게 있었다. 디지털 세대라 통칭되는 요즘 아이들은 슈퍼맨이 ‘가짜’라는 것을 알만큼 영악하고 똑똑하다.

하지만 그 아이들은 티비나 비디오 보다 더 강력하고 매력적인 온라인 공간에서 헤매고 있다. 컴퓨터 게임에 광적으로 몰입하고 손안에 든 핸드폰 하나로 세상과 소통하는 아이들은 종종 가상공간과 현실의 경계에서 중심을 잃기도 한다. ‘온라인 모드’로 현실을 이해하고 살아가려는 ‘리셋 증후군(reset syndrome)’이라는 신종 컴퓨터 질병이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지배할 태세다.

인생 리셋, 죽거나 죽이거나

‘리셋 증후군’이라는 말이 처음 나온 것은 1997년 일본에서였다. 게임광이던 중학생이 초등학생을 토막살해하는 엽기적이며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난 후, 컴퓨터 게임의 위해성을 일컬어 만들어진 신조어이다. 흔히 컴퓨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게임에서 지고 있을 때 리셋 버튼만 누르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처럼, 현실세계의 인간관계나 일도 언제든지 새롭게 ‘리셋’ 가능할 것으로 착각하는 현상을 말한다. 최근 전방에서 일어난 총기난사사건의 범인이 컴퓨터 게임광으로 알려지면서, 리셋증후군은 이 사건의 ‘숨겨진 가해자’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텔레비전, 컴퓨터, 휴대폰 등 버튼 하나로 조작할 수 있는 것을 ‘리셋(reset)’제품이라 한다.
명실 공히 ‘네트워크로 하나 되는 세상’을 살고 있는 요즘, 리셋제품 없는 일상생활은 상상할 수 없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나라 초, 중, 고 학생의 20% 가량이 인터넷 게임중독증을 앓고 있으며, 인터넷 게임에 몰입하는 아이들에게서 ‘리셋증후군’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가상의 온라인 공간에서처럼 현실도 언제든지 ‘리셋’이나 ‘로그오프’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판단력이나 자제력이 부족한 아이들의 경우 자살이나 폭력, 살인 등의 충동적이며 공격적인 행동을 억제하기 힘들 수도 있다. 인생은 ‘리셋’도 ‘리필’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기에는 너무 어린 그들이 아닌가.

가상과 현실의 경계 모호

얼마 전 서울 경기지역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80%가 ‘게임속의 일이 현실에서도 일어났으면 좋겠다’ 고 말한 것으로 드러났다. 위험천만하게도 아이들은 온라인 공간에서 경험한 일을 현실에서 여과 없이 ‘재생’하기도 한다. 초등학생들이 훔친 차를 몰다가 다중추돌사고를 내는 사건이 잇따라 일어났다. 알고 보니 자동차 운전게임인 ‘카트라이더’를 흉내 내느라 그랬단다. ‘리니지’게임에 몰두하던 아이가 학교선생님을 ‘몬스터’로 착각해서 폭행하는 일도 있었다.

리셋증후군에 관한 티비 토론에 참석한 한 학부모는, 총기난사사건 뉴스를 보던 초등학생 자녀가 “야~, 멋지다.”고 말해서 기겁했다고 한다. 인터넷 공간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는 아이들의 뇌 회로에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게임 속 가상공간은 터무니없니 자극적이고 폭력적이니 문제이다.

온라인 산업의 리셋이 필요

단순히 디지털 세대 아이들의 문화적 현상으로 치부하기에는 컴퓨터게임으로 인한 폐해가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미성년자의 야간 온라인 게임접속 규제’등의 청소년 보호법 개정안도 발의할 모양이지만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는 의문이다. 온라인 산업은 끝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고 아이들은 게임이 열어주는 신천지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으니, 이 정도 법규로는 ‘언발에 오줌누기’일 공산이 크다.

미국의 컬럼바인 고등학교 총기난사사건의 피해자 가족들은 ‘범인들이 폭력게임의 영향을 받았다’며 25개 게임업체를 상대로 소송을 낸 적이 있다. 컴퓨터 게임이 범죄교사의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여준다. 아이들에게 컴퓨터를 멀리 할 것을 주문하기 전에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온라인 게임 산업의 ‘리셋’부터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인생 리셋을 꿈꾸는 아이들이 더 늘어나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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