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 그 ‘사이’를 위하여

예술강좌에 대하여

주변에 여러 지인들이 있다. 직업도 다양하고, 취미도 다양하지만, 모두 성실하고 맑은 열정 하나쯤은 지키고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이다. 이들은 팍팍한 사회생활에서도 우정을 알고, 때로 마음 아파하며 살아가는 따뜻한 사람들이다.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든든한 일이고 무엇보다 사는데 용기를 준다. 이 지인들을 만나게 된 건 ‘미술 및 미학 강좌’에서 이다. 요즘 들어 학교가 아닌 일반 문화센터나 박물관 등에서 예술관련 강좌가 부쩍 늘어난 것 같다. 대규모 유통업계를 통해 진행되는 강좌들이야 기왕에 있어 왔지만, 보다 작은 규모로 동네마다 개설되고 있으며 또 한층 전문적인 내용을 담아 특별행사로 진행되기도 한다. 이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도 점차 높아지고 있는 듯하다. 이런 행사가 양적으로 늘어난 데에는 문화자원 확충이라는 정부의 기본 정책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어째든 몇몇 지인들을 알게 해준 이 강좌는 어떤 기회가 되어 필자가 구성한 것이었는데, 정작 강좌를 개설해 놓고도 일선에서 스물 네 시간이 부족하게 뛰는 사람들이 이론 강좌를 들으러 일부러 찾아온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더군다나 미술에 푹 빠진 것도 아니고, 미술과 유독 별난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미술 및 미학 강좌’를 개설한 이유는 몇 가지가 있지만, 미술과 인연을 맺은 지 여러 해가 지나면서 나름대로 느낀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수년을 보내고 나니 미술에 대한 호기와 치기도 지나가고 미술과의 대면은 날이 갈수록 ‘만만치 않다’는 존재감이 커져갔다. 화려해서 정작 미술이 묻혀버려도 안되겠고, 미술을 다른 것과 끼워 팔아도 안되겠고, 전문가들 버전만으로 접근해도 안되겠고, 전문가 없는 형편은 더욱 안되겠고… 미술에 대해서 ‘냉소와 열정’ 그 사이는 거의 비어있는 허약한 미술의 실상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말하자면 미술에 대한 관객의 블루칩이 없다고 할까. 강단에서의 강의도 매우 보람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미술이 유통되는 곳은 학교가 아니라 사회현장이고 보면, 강단에서와 같은 매뉴얼로 현장에 임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늘 하게 된다. 현장에서 작품을 전시하면서 이루어지는 모든 수요와 담론을 통해 구성되는 모든 재생산은 나름의 고유한 프로세스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이 과정 중에 ‘냉소와 열정’ 그 사이의 관객들이 언제나 연루되어야만 한 사회에서의 미술은 튼튼하게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관객층을 늘려나가는 데에 한 몫을 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예술관련 강좌들의 개설이 아닐까. 무언가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미술의 반경이 얼마나 크고 튼튼한가에 따라 결국은 보석 같은 작가들의 창작열을 불태우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수도권을 제외한 지역에서의 미술 수요와 담론을 통한 재생산은 그 실정이 매우 딱하다. 특히 담론을 통한 미술의 재생산은 현장의 프로세스고 뭐고 간에 처음부터 입댈 처치가 없는, 한마디로 불모지나 다름없다. 담론이 형성될 수 있는 방편이 전혀 없는 것. 이건 전시가 있고 없고, 전문가가 있고 없고, 작품이 팔리고 안 팔리고의 문제가 아니다. 말하자면 시스템이 없는 것이다. 이런 고민 중에 만들어 본 것이 ‘미술 및 미학 강좌’인데, 이것이 시스템을 대신할 수야 절대로 없겠지만 미술의 반경을 넓힐 수 있는 징검다리 역할로서, 연관 고리로서의 한 방법은 될 수 있을 거라 내심 기대는 있었다. 서울을 제외한 다른 지역의 사정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되는데, 모든 미술 전시는 단신으로 나가는 홍보 이외, 별도의 유통수단이 전무한 상태이다. 작품의 모든 수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어땠는지 등 사후 소식은 알길 없고, 단지 몇 점 팔렸다더라 하는 무성한 소문만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품이야 당연히 팔려야 하겠지만 소문인 점이 딱할 뿐! 말하자면 시스템이 없는 자리에 바람만 헐렁하게 불어대는 꼴이다. 그 바람 중 일부는 서울로부터 부는 바람이다. 이런 와중에 진정으로 궁금해서 강좌를 들으러 오고, 더디지만 미술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저버리지 않고 걸어오는 사람들은 미술 전문가들이 아니다. 이들이 미술전문가들은 아니지만, 전문가들을 존재케 하는 반드시 필요한 자원임은 분명한 것 같고, 미술의 건강성과 세련도를 가늠하는 지표들이기도 하다. 물론 전문가들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가령 비평, 기획, 창작 등)은 당연히 전문가들의 몫이지만, 꾸준히 전문적이게끔 해주는 것은 바로 이들의 지지를 통해서이며, 이들의 덩치가 커지고 강력해질 때, 우리 미술의 창조적 대응력 역시 강력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야 동원된 인원이 없어도 미술행사가 자발적으로 탄력 있어지는 것 아닌가. 외국 어느 오지 마을에 음악회가 열렸는데, 저녁 바람에 대문 밖으로 나와 호호할머니부터 옆집 아줌마까지 그 마을 주민들 모두 모차르트 연주회를 감상하더라는 어느 무림의 소식처럼 말이다.
이들 중에는 정말 미술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있고, 이미 작품을 구매해보고, 전시장을 여러 번 다녀본 사람도 있다. 중요한 것은 모르는 대상이라고 해서 함부로 폄하하지 않고, 손쉽게 취급하는 냉소적 태도가 없다는 점이다. 외국어를 배우듯이 조심스레 그 언어에 다가서며 뭔지 모르지만 가슴을 열고 감동받기를 순진하게 기다리기도 하고, 감동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대단히 솔직하다. 꽃그림을 좋아하기도 하고, 미니멀을 좋아하기도 하며 그 차이는 여러 면에서 천양지차다. 하지만 이들이 곧 개성과 심미안을 지니게 될 것을 나는 안다. 어쨌든, 이들을 통해 미술의 파이를 넓히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게 해준 보람 있는 경험이었다.
이러한 미학강좌에 대구에서 학교 이외 강좌가 개설되는 곳은 박물관, 화랑, 각 구청의 문화센터, 각 구의 도서관, 동사무소 그리고 유통업체 문화센터 등이 있다. 실기도 있지만, 각 예술작품의 감상과 연관된 과목들도 다양하게 개설되고 있어서, 최소한 문화예술에 대한 어떤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비단 미술분야 뿐만 아니라 여러 문화예술분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열정’과 ‘냉소’ 그 사이에 있는 건강한 관객층들을 위해 다양한 기회로,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제공되어졌으면 좋겠다.
너무 많아도 선택하기가 힘들겠지만 수요가 많아지면 자연히 수요자 층에서 질적인 문제에 대한 옥석을 가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이 천편일률 같은 방식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종국에 가슴을 열어 한 단계 올라서는 그 밀도는 비슷할 것이라 믿고 있으며, 이런 경험의 층이 두터워 질 때 문화적으로 성숙하게 되는 건 아닌지 생각해본다.

글. 남인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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