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경제는 누가 살리나?

나, 대한민국 평범한 주부. 경제학적 지식이라고는 신문에 난 경제기사 ‘어쩌다 가끔’ 읽는 것이 전부인 여자. 가계부는 늘 정초에 일주일이나 보름정도 쓰다가 골치 아파서 던져버리는 경제적으로 퍽이나 게으른 주부. 해마다 연말이면 ‘연말정산 잘 하는 법’을 뉴스에서 귀 따갑게 들으면서도 그 복잡한 숫자놀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버리 아줌마… …  그러고 보니 평범한 주부가 아니라 약간 모자란 주부 같다. 어쨌든, 경제적 몰상식의 수위를 넘어선 이 아줌마의 레이더망에 ‘동네경제 비상사태’가 포착되었다. 동네경제의 위기가 경제이해지수 최하의 아줌마도 체감할 만큼 심각하다는 것인가 ?

“ 쇼핑의 차이가 당신을 말해준다 ”

쇼핑의 차이가 당신을 말해준단다. 조간신문 전면 광고에 실린 국내 유수의 홈쇼핑 광고 카피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가를 말해준다”고 떠들어대며 없이 사는 사람 기죽이더니 이제는 쇼핑도 가려서 하란다. 식전 댓바람부터 입맛이 쓰지만, 곰곰 따지고 보면 대한민국 보통아줌마들의 쇼핑 방법이 최근 몇 년 사이에 많이 달라지긴 했다. 주말이면 온 가족이 나들이 가듯 대형 할인점에 들르는 것이 ‘중산층 편입’의 지표로 여겨지고 있는듯하니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휴일 대형할인점 매장은 잠깐 한눈팔다가는 카트에 옆구리 받히기 십상일 만큼 사람들이 넘쳐나고, “ 00 마트 도보 몇 분 거리”가 아파트 분양광고의 필수 항목으로 자리 잡을 만큼 할인점은 편의시설의 일부가 되고 있다. 문제는, 대형할인점의 눈부신 호황이 곧 동네 시장의 불황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최근 겪은 아줌마의 쇼핑 경험담을 털어놓으면 이렇다.
대형 할인점에서 ‘해리포터와 혼혈왕자 1’을 8,500원에 샀다. 최저가를 생명으로 여기는 할인점도 책은 정가대로 판매한다. 도서정가제 때문이다. 하루 뒤 인터넷 쇼핑으로 ‘해리포터와 혼혈왕자 2’를 구입했는데, 무려 2,500원 가량이 할인되었다. 기름값 들여서 발품파는 것 보다 집에서 손가락 까딱거려서 손쉽게 사는 것이 훨씬 싸다니, 아줌마의 경제상식이 뒤집어지는 순간이다. 물론 온라인 서점의 놀라운 가격경쟁력에도 불구하고 대형할인점 안 서점은 망하지 않는다. 만화책을 공짜로 제공하는 파격적인 서비스가 아이들 발길을 잡아채기 때문이다. 그럼 아줌마가 살고 있는 동네의 작은 서점은 어떨까 ? 2천 세대 가까운 아파트 단지를 통틀어 달랑 하나있는 서점, 가끔 들르는 그 서점에는 창백한 형광등 아래 마른 식빵처럼 건조한 표정을 지닌 주인아저씨가 썰렁하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대체 이 서점에서는 하루에 책이 몇 권이나 팔릴까 ?

고래싸움에 터지는 새우등

1990년대 말, 월마트를 비롯한 외국계 대형할인점이 우리나라에 상륙했을 때 국내 토종 할인점과 외국자본과의 돈 비린내 나는 전투가 시작되었다. ‘제살 갉아먹기’라는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할인점간의 가격인하 경쟁은 치열하게 이어졌다. 당시 ‘이 마트’는 TV 한 대당 10만원의 손해를 감수하면서 까지 팔았다는데, 할인점 간의 가격경쟁으로 소비자들이 이익을 보고 있다는 뉴스보도가 연일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곰곰 따지고 보면 저가판매로 소비자가 이득을 본다는 발상은 나무만 보고 숲은 못 보는 무지한 소견이다. 거대자본을 무기로 한 대형 유통업체의 살신성인에 가까운 저가공세는 결국 소자본으로 꾸려지는 영세 상가들이 발 디딜 틈을 주지 않는다. 할인점 간의 고래싸움에 새우등이 터지고 있는데, 소비자 이익을 운운하며 ‘유통 대란’에 박수를 쳐주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닌가.

남의 밥그릇은 넘보지 말라

유통업계의 성공신화를 자랑하는 ‘이 마트’의 성공이유 중 하나가 소비자들의 ‘접근 용이성’ 이라고 한다. 초창기 도심외곽에 자리 잡았던 창고형 할인매장의 한계를 간파한 마케팅 전략이라 하는데, 바꾸어 말하자면 주택가 인근의 소규모 상권을 싹쓸이하듯 잠식한 것이 성공의 한 이유라는 것이다. 솔직히 아줌마 입장에서 대형할인점은 두말 할 나위 없이 편하다. 아이들 과자부스러기부터 생필품과 가전제품까지 논스톱 쇼핑이 가능한데다가 최저가격이 아니면 현금보상도 해준다는 황송하기 이를 데 없는 저가공세, 그리고 외상에 할부까지 ! 반짝 세일 현장에서 값싼 물건을 찾아 온 몸을 던지는 보통의 아줌마들이 값싸고 편리한 쇼핑공간을 마다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대형 할인점이 지닌 ‘값싸고 편리한 쇼핑’의 이면에는 무서운 ‘정글의 법칙’이 적용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할인점의 가공할 만한 저가공세의 최대 피해자는 동네상가 자영업자들이다. 거리로 내몰린 이들은 대형 할인점이 내세우는 ‘지역 고용 창출’이라는 명목 하에 할인점의 계약직 저임금 노동자로 전락할 지도 모른다. 할인점 가격경쟁력의 바탕에는 알바를 비롯한 계약직 노동자들의 저임금이 한몫하고 있는 것 또한 자명한 사실이다. 결국 경제성과 편리함에 맛들인 나 같은 보통 아줌마들이 대형 할인점에서 유유자적 쇼핑 카트를 끌고 다니는 동안,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상권은 고사(枯死) 일로를 걷게 되며 우리의 이웃은 자영업자에서 저임금 노동자로 내몰리게 된다.
유통망 혁신과 박리다매를 통해 저가판매를 하는 대형 할인점이 도심 외곽에 견고히 자리잡고 유통업의 한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면 누가 뭐라 할 것인가. 하지만 대형 할인점이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 주거지역 깊숙이 속속들이 침투해서 소형 점포의 생계를 위협한다면 이것은 엄연한 상거래 질서 위배다. 할인점의 입점을 규제하는 제도적 장치가 시급해 보인다. 물론, 동네경제 활성화를 위해 대형 할인점들이 스스로 외곽으로 벗어나 주면 더 바랄 나위 없겠지만 말이다. 냉혹한 먹이사슬이 지배하는 자연상태의 정글에서는 고사하거나 멸종하는 동식물이 없다. 동식물은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지도 남의 밥그릇을 뺏지도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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