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치민 3꿍의 진리- 이재성회원

이재성회원이 평화뉴스에 쓴 칼럼입니다. 옮겨 싣습니다.

장면 1 : 용산 참사가 일어난 지 200일이 넘었다. 철거민 5명, 경찰 1명의 고귀한 생명을 앗아간 이 사건은 아직도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장례도 치르지 못한 유가족들은 지금도 경찰과 대치한 채 불편하고 고단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장면 2 : 쌍용차 노조의 노동자들이 공장 점거 농성 76일, 굴뚝 농성 85일이라는 극한의 생존권 투쟁을 벌였다. 이유는 ‘함께 살자’였다. 얻어낸 것이라곤 겨우 정리해고 52%, 무급휴직과 영업직 전환 등 고용보장 48%라는 벼랑 끝 합의안 뿐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위의 두 장면은 사건의 시작부터 진행되어온 과정과 결말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에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악덕과 악행을 다 보여주고 있다. 개발지상주의, 승자독식주의, 무한 탐욕, 불로소득, 빈익빈 부익부 현상, 계층 갈등, 편 가르기, 색깔 짓기, 국가 폭력, 사적 폭력, 유전무죄 무전유죄, 인명 경시, 양심 마비 등등.

삽질의 개발만이 살 길이라고 외치는 토건의 나라,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실패자는 무능력하다는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나라, 부동산으로 안정된 불로소득의 무한 증식을 가능하게 하는 나라, 부와 가난을 대물림하는 나라, 가난한 자는 생존권도 보장받지 못하는 나라, 나와 의견이 다르면 빨갱이와 수구꼴통이 되는 나라, 공권력이 공공의 이익이 아니라 특정 권력과 자본의 도구로 전락하는 나라, 법과 인권이 특정 권력과 자본에 종속되는 나라, 나의 이익과 관련된다면 타인의 죽음마저도 무관심한 나라, 그래서 한마디로 개인의 도덕감과 사회의 윤리성이 전면적으로 상실된 나라에서 산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선비의 일식삼찬, 호치민의 3꿍

옛날 조선의 선비와 관련된 일화에는 검소한 식사 태도를 선비의 덕목 중에서 으뜸으로 꼽는 대목이 있다. 일식삼찬이라 이름 하여 ‘밥 한 공기에 반찬 세 가지’로 식사를 하는 행위이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에 선비가 본을 보여야 백성들이 본받을 것이라는 호구지책으로 나온 방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특정 공동체 혹은 한 사회의 지도자가 스스로 모범을 보이는 이런 행위는 그 어떤 아름답고 현란한 수사들보다도 호소력이 있다.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의 영웅 호치민은 평생을 일식일찬을 했다고 한다. 모든 인민이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며 살아가는데 지도자로서의 그런 행위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 호치민이 베트남 인민들에게 강조한 것이 바로 3꿍 정신인데, ‘꿍아’(함께 산다), ‘꿍안’(함께 먹는다) 그리고 ‘꿍담’(함께 일한다)이었다. 역사적으로 오랜 외부의 침입과 제국주의의 약탈을 경험했고, 이념적 민족분단까지 겪었던 베트남의 미래로 호치민이 꿈꾸었던 것은 모든 인민이 함께 일하고, 함께 먹으면서 함께 사는 나라였던 것이다.

아마 용산 철거민들도 그랬고, 쌍용 자동차 노동자들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한국사회에서 함께 일하고, 함께 먹으면서, 함께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인지 몸으로 겪었고, 정신으로 겪고 있다. 시대를 탓할 수도 있고, 자칫 허무주의와 패배주의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들이 개입해야 할 궁극적 진리는 함께 일하고, 함께 먹으면서, 함께 사는 것이다.

함께 일하고, 함께 먹으면서, 함께 사는 이 진리는 동시에 우리 모두의 진리이기도 하다. 이 진리는 확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생산되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사건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때문에 진리는 곧 ‘사건’을 통해서 생산된다. 이때의 사건은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말을 빌려 표현하면, ‘기존 사회질서를 교란하고 균열시키는 예기치 못한 사태의 돌발’을 뜻한다.

진리, 사건과 개입

그런 점에서 사건은 기존의 지배적 관점에서 보면 규정할 수 없고 명명할 수 없는 ‘결정 불가능한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기존 사회의 이해 지평을 벗어난 사태이다. 용산 참사나 쌍용 자동차 점거 농성과 같은 경우도 개발지상주의와 승자독식주의가 지배하는 기존 한국사회에서는 변함없이 예외적인 사태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새로운 사태를 ‘진리’로 인식하고 결정하는 행위가 필요한데, 바디우는 그것을 ‘개입’이라고 부른다. 적확한 인식과 결정이 없는 사건은 진리가 되지 못한 채 주변화 되거나 무의미한 것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개입을 통해서 그 진리 인식과 결정을 충실하게 추동하는 과정에서 ‘주체’가 등장하고, 이 주체의 활동이 ‘역사’를 만든다.

이미 2천 년 전에 바울은 자신의 시대 안에서 이렇게 외쳤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하십시오.”(로마서 12장 2절)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시대를 탓함으로써 시대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정면으로 부딪치며 함께 사는 것이다.

시대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시대에 순응해서는 안 된다. 인간 주체가 갖는 믿음과 확신의 명령 하에 변화되는 것은 시대라기보다는 오히려 주체 자신이다. 따라서 그러한 변화의 열쇠는 주체 자신의 사유와 행위 속에 있다. 호치민이 그 험난한 시대 안에서 3꿍 정신을 사유하고 행위함으로써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냈던 것처럼, 우리도 ‘지금 여기’ 이 시대 안에서 새로운 사유를 통해 변화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재성 칼럼 11] 이재성 /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계명대 교양과정부 교수.
대구사회연구소 연구실장 ssyi@km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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