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해야해요. 내가 외치지 않으면…

이용수 정신대 할머니를 만나다.

뜨거운 공기가 숨을 압박해오는 오후 2시경, 약속시간이 다 되어 걸음을 재촉했다.
산자락 아래 자리잡은 아파트에 도착하니 싱그럽고 시원한 숲 내음이 선선한 바람과 함께 느껴졌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시원해 보이는 푸른 치마를 입은 이용수 할머니(만76세)가 마중나와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통로 바로 옆에 위치한 할머니의 아파트는 베란다와 현관이 일직선이라 현관문을 열어놓으면 통풍이 잘되어 비교적 시원했다.

이용수 할머니와의 첫만남

원래 어제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이용수 할머니의 몸 상태가 좋지 못해 하루 미루어진 만남이었다. 작지만 정갈한 방에 마주앉아 인사를 나누며 말문을 연 이용수 할머니는 예상보다는 건강한 모습이었으나 얼굴이 다소 피로해보였다. 최근에 중국을 비롯해 일본에도 다녀오는 등 대구를 벗어나 외지에서 장기체류를 한 때문인 듯 했다.

“7월 8일부터 일주일간 나눔의 집 할머니 다섯분과 함께 중국에 다녀왔어요. 원래는 더 일찍 가기로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6월 30일에 일본대사관 앞에 도착하니까 수요일인데도 할머니들이 아무도 안 계시더라구요. 알고보니 김순덕 할머니가 많이 편찮으셔서 중앙병원에 계시다는 거에요. 너무 충격이어서 맥이 다 풀렸어요. 그래서 보통 1시간은 데모를 하는데 그날은 30분 정도 밖에 안했어요. 그리고 그날 김순덕 할머니가 1시 40분에 운명하셨어요.”
이렇게 뜻하지 않게 또 한 분의 할머니 장례식을 치렀다. 며칠 뒤 중국을 다녀온 다음에는 바로 다음날인 7월 16일 일본 북해도로 발걸음을 돌렸야 했다. 서울에서 출발해 오사카를 경유한 그 여정은 새벽 2시가 되어서야 북해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태평양 전쟁 희생자들 위령비를 세워 놨더군요. 일본인 유족들도 400~500명 섞여 있었어요. 거기서 김순덕 할머니 위령제를 지냈어요. 거기는 원래 날씨가 별로 안좋은데 그날따라 날씨가 굉장히 좋았어요. 위령제에서 시가 있었는데… 그 시를 못가져왔네… 시가 너무 서러웠어요.”
이용수 할머니가 크지 않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곱게 말을 꺼내는 모습은 영화나 다른 인터뷰 속에서 보이던 일본정부에 맞서 항의하고 싸워나가는 투사에 가까운 모습과는 또 달랐다. 그러나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또렷하고 분명하게 말을 했다.

“위령제를 지낼때 50대 일본 여성이 신발을 벗고 올라와서 절을 했어요. 일본 사람으로서 피해자 앞에서 사죄를 안 드릴 수 없다고 하더군요. 제가 그분을 일으켜서 같이 안고 울었어요… 일본사람들이 위령비를 세워준게 고맙기도 하고 서럽기도 하고… 갈 때는 무슨 행사가 있는지도 모르고 갔어요.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는 걸 느꼈지요.”

아물수 없는 상처
막 꽃피기 시작한 열다섯 나이에 자다가 끌려 나가 전쟁이 뭔지도 모르고 낯선 이들에게 유린당한 소녀는 전쟁이 끝난 후 긴 세월 숨죽여 살다가 지금은 종군위안부라 불리우는 할머니가 되었다. 13년째 이어오고 있는 일본대사관 앞에서의 ‘수요집회’에 처음 참석했을 때에는 머리가 하얗지 않았다. 그러나 올해 초 600차 수요집회를 할 때 들여다본 거울 속에는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카락이 예전의 머리카락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용수 할머니는 염색을 했다. ‘내 머리는 아직 까맣다. 그러니까 일본 정부와 싸워 이겨야 한다.’는 주문을 외우며.

일본정부에서 종군 위안부의 존재조차 부인했을 때 움직일 수 없는 증거로 자신의 존재를 내보였던 많은 할머니들이 숨을 거두고 이제는 130여명 정도만 살아있는 형편에 남은 이들마저 한 해 한 해 고령화되고 있다. 그리고 대구에는 열 분 가량의 할머니들이 살고 있다. 그러나 모든 할머니들이 이용수 할머니처럼 적극적으로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참여 하지 않는 분들이 많은 편이다.

이용수 할머니도 92년 한국일보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기사가 난 것을 보고 직접 전화하기 전에는 이런 피해를 당했다는 얘기조차 주변 사람들에게 하지 못했다. 동생들이 모아주는 돈으로 생계를 꾸려갈 수 있었다.
그 시절의 생채기는 걷어올린 치마아래 아직도 비스듬히 칼자국으로, 복사뼈옆의 담뱃불 자국으로, 군화로 채여 6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큰한 발목으로 남아있다. 가미가제부대 장교 방에 들어가라는 요구를 거부하고 당한 전기고문은 손이 저린 후유증을 낳아 수술을 해야만 했다.
“아버지, 할머니가 도둑이 들어와서 목숨 내놓을래, 몸 내놓을래 하고 말하면 목숨 내놓는다고 가르칠 정도로 할 정도로 한국여자들은 소중히 여겼는데….. 그때 다섯명이 같이 끌려갔어요. 그중에 친구 한명이 돌아와서 저를 불러냈어요. 그 친구는 당시 에이즈에 걸려서 얼굴이 엉망이었어요. 너한테 얘기하고 나서 나는 물에 빠져 죽을 거다 라며 얘기를 꺼내더군요. 난 집에도 못갔고 부모도 못 만났다. 날 용서해라.. 내가 널 불러냈다라고. 그 얘기를 들을 때는 그 아이가 참 못됐다 싶었는데 지금은 총칼 들이대면 어쩔 수 있었겠나 싶어…”

일본군 장교가 그 친구를 한달동안 데리고 다니면서 머리에 총을 들이대고 딸을 곱게 키운 집을 골라 친구를 불러내도록 했던 것이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차분한 음성 뒤로 언뜻 보이는 것은 이미 반세기가 지나고 육체에 깃든 상처마저 아물어 있는데도 여전히 아물지 못한 상처였다.

피해자들이 두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감히
변영주 감독과 99년 개봉된 <숨결>을 찍을 때의 일이었다.
“참 마음 아픈게 있는데… 영화 촬영할 때 80명 정도의 피해자들이 살고 있는 필리핀 마키시마라는 마을에 가서 아라끼라는 일본사람을 만났어요. 전쟁 때 대만에서 한국처녀들을 한 배에 가득 싣고 필리핀으로 오던 중에 배가 적한테 추격을 당했어요. 일본군인들만 다른 배로 피신하고 ‘저런 조센삐는 얼마든지 끌고 올 수 있으니 그냥 죽여라. 배를 그대로 가라앉혀 죽여라.’라고 명령해서 그 처녀들은 거기서 다 죽었어요. 그 사람은 양심이 남아있지. 인형에 한복 입혀서 그 처녀들이 가라않은 곳에 가면 위로해주려고 가지고 있더라구. 그날 아침 8시에 위령제를 지내줬어요. 그런데 일본에서도 상영이 되야 하니까 너무 심하다고 느껴졌는지 이 부분이 영화에서 빠졌더라고..”

엎드려 사죄하는 하나 하나의 일본국민은 죄가 없다고, 그러나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정부는 죄를 느끼고 내 앞에 엎드려 사죄를 해야한다고 일순 목소리를 높이는 이용수 할머니. 한국과 일본의 두 정상은  더 이상 과거사를 논하지 말자고 이미 합의를 봤다. 그러나 세상의 어느 누구도 피해 당사자들을 제쳐놓고 그들 마음대로 해결이 되었다 안되었다 결정할 수는 없다.

나는 계속 외칠수 밖에 없어요
“내 문제니까… 내가 있으니까… 내 부모님이라도 (마음대로) 할 수 없지… 내 문제니까…”
이용수 할머니는 그렇게 나직하게 말했다. 60여년전 국민을 지켜주지 못했던 힘없던 나라는 이렇게 반세기가 지나고도 오히려 그 피해자들의 상처에 또다른 생채기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할머니가 이렇게 얘기할 수 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변호사는 수요집회에 가서 데모하지 말라고 해요. 그렇지만 나는 가야 돼요. 내가 안 외치면 아무도 내가 그런 짓을 당했는지 몰라요. 누가 알아줄까요? 누가 대신해 주겠어요?”

이용수 할머니는 내일은 나눔의 집에 갔다가, 일요일에는 다시 대구에서 ‘파병반대도보행진’에 참여할 예정이다. 이렇게 어느 누구보다도 바쁜 할머니의 행보는 일본정부가 잘못을 인정하고 우리도 당당하게 그 사과를 요구하게 되는 그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다큐멘터리 영화 <숨결>의 포스터 문구인 ‘내가 원하는 것, 나의 역사, 나의 숨결, 나의 마지막 명예…<숨결>’을 외우고 있는 이용수 할머니는 아마도 그 날이 올 때까지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그러나 쉬지 않고 내딛을 거다.

글_박현 자원활동기자

댓글 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