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섭의 역설-이재성회원

운영위원으로 활동하시는 이재성회원이 평화뉴스에 기고한 글입니다. 옮겨 싣습니다.

통섭의 역설, 한국사회 어디로 갈것인가?

벚꽃이 만개하고, 온 사방이 봄기운에 취한 어제 항도 부산을 다녀왔다. ‘통섭과 반성’이란 주제의 학술대회에 논평자로 참석했다. 통섭(統攝)이란 용어가 우리 사회에 알려진 건 최근의 일로 사회생물학자 최재천 교수의 작품이다. ‘인문학의 위기’와 관련해서 급조된 개념이기도 하다. 이 용어는 최교수의 스승인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역저 〈Consilience〉의 번역어다. 원효가 사용한 이 용어를 최교수가 선택한 이유는 용어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의 다의성을 가장 잘 표현해 주기 때문이란다. 윌슨이 Consilience를 통해 의도한 바는 ‘모든 지식을 하나의 가닥으로 통일해서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본성을 잘 설명’하는 데 있었다. 물론 그 한 가닥으로서의 궁극원인은 ‘생물학’이다.

오늘날 우리 시대를 ‘생물학의 시대’라 정의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인간 복제’, ‘유전자’, ‘진화’라는 용어가 매스컴을 넘어 일상의 대화를 장악하고 있지 않는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오랜 철학적 물음이 현대 생물학의 성과를 통해 한층 강화되고 있다. ‘유전자가 인간의 본성을 결정한다’는 단순명쾌한 논리는 마침내 ‘철학의 종말’을 선언하는 듯하다. 암 유전자에서 동성애 유전자, 범죄 유전자, 비만 유전자를 비롯해 최근 행복 유전자에 이르기까지 분자생물학의 요란한 발견 목록이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한지는 이미 오래다.

이런 현상은 올해가 다윈의 탄생 200주년이라는 시의성과 관련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역저 <종의 기원>에서 새 종자는 어떻게 탄생하는지를 과학적으로 ‘설명’했다. 이를 위해서 그는 ‘자연선택설’이라는 새 이론을 고안했다. 자연선택에 따르면,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개체와 종은 살아남지만 나머지는 소멸하고 만다. 말하자면, ‘생존을 위한 투쟁’은 개체 간에 일어나는 문제로 보았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다윈의 이 말에 공감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의 사회적 행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을 지칭하는 윌슨의 사회생물학 역시 다윈의 자연선택설에 공감한 결과다.

윌슨은 인간의 모든 사회적 행동이 생물학적 기초 위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자연선택에서 선택되는 것은 개체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개체가 갖고 있는 ‘유전자’다. 개체는 단지 유전자가 증식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유전자의 운반자에 불과하다. 인간이란 몸이든 마음이든 사회든, 결국 자연선택된 유전 프로그램의 표현일 뿐이다.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유전 프로그램의 생존과 번식에 있다. 한마디로 ‘유전자 결정론’의 완성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인간과 동물의 공동생활은 각각의 생존원리에 따라 조직되어 있다. 자연선택에 의한 단계를 거치면서 나름의 형태로 발전했다. 그 과정에서 생존에 유리한 것으로 입증된 사회적 행동양식은 선호되었고, 생존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다른 사회적 행동양식보다 우위를 점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따라서 모든 사회적 행동양식들은 유전적으로 프로그램화되어 있으며, 인간에게나 다른 생물에게나 하나의 유전적 성향이 특정한 사회적 행동양식에 각인되어 있는데, 이 모든 것이 진화가 엮어낸 최적화 과정의 결과이다.

하지만 사회생물학의 학문적 성과가 인간 이해의 지평을 확장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하더라도 인간 행동의 형질에 특정한 유전자가 존재한다는 환원주의적이고 결정론적 방향은 자칫 정치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다분하다. 그럴 경우 새로운 사회적·철학적 문제들이 초래될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현대 생물학주의가 인간의 삶과 역사를 자연의 언어로 바꾸어 번역함으로써 인간 자체에 대한 개념을 바꾸고, 이 새로운 인간 개념을 통해 인간 삶의 문제에 대한 세계관적 지침을 찾으려고 시도할 때 어떤 문제가 야기될 것인지를 반성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인간은 동물들의 행동과 다르다. 제비는 벌레를 사냥하거나 둥지를 짓는 자신들의 자연적인 성향을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하지 않지만, 인간은 자신의 생물학적 본성을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다. 인간이 만든 도덕적 규범들의 총체로서의 문화가 전적으로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일 수 있으며, 그것을 인간이 만들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사실’로부터 ‘당위’를 필연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는 생물학주의의 위험성은 인간의 삶을 사실로서만 규정하고 그것을 ‘과학적’이라고 설명하는데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 중요한 것은 사실뿐만 아니라 당위이다. 때문에 인간의 삶이 근거하고 있는 복잡한 사회조직의 다양한 현상들을 생물학적 용어로만 ‘설명’하려는 전략은 지나친 강박증이다.

지금 한국사회는 진화론이 활짝 핀 생존투쟁의 장이다.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간 금융자본가들, 한반도 대운하를 4대강 정비계획이란 이름으로 조작한 지식기사들, 성 접대 의혹사건의 핵심 당사자들, 권력형 부패의 그늘을 보여준 박연차 리스트, 연예산업의 추악한 비리를 드러낸 장자연 리스트, 일제고사로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자들, 대학 총장 선임을 정부 입맛대로 요리하는 사태 등에서 진화론의 산물을 확인할 수 있다. 개체들 간에 일어나는 생존의 투쟁이 극악하다.

지속가능한 녹색성장이라는 현 정부의 신자유주의의 맹목적 구호에서도 동물적 행동과 유사성을 보이는 생물학주의가 엿보인다. 이것에는 인간 본성에 내재한 도덕적 가치의 정당화 과정이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오직 적자생존의 원칙과 진화에 대한 신념만 존재한다. 한국사회는 성 상납 의혹과 관련해서 당사자인 청와대 행정관이 “그런 일 없다”고 잡아떼면 경찰총수가 “재수 없으면 걸린다”고 두둔해주는 사회이고, 논문표절과 관련해서 매스컴에서 연일 보도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당사자인 한국건설기술연구원(건기연) 원장이 “그런 일 없다”고 응수해서 살아남는 사회다. 이런 행동양식이 생존의 법칙이고 발전이며, 사실로부터 추론된 필연적 당위이다. 정글의 법칙만 통용되는 한국사회 도대체 어디로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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