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론 – 조희연

사람2

시민사회론

1.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과 시민사회

1/1 왜 시민사회인가?
1/2 시민사회 형성의 역사: 국민국가와 시민사회
1/3 한국의 근대와 시민사회

1/1 왜 시민사회인가?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과거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8월 30일 신임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된 사람이 취임 후 한 달도 안되어 사퇴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는 우리 사회에서 대표적으로 성공한 학자이자 대학경영자로 인정되었던 사람이고, 대통령은 그가 앞으로 우리나라 교육개혁의 과제를 책임지고 추진할 수 있는 최적임자라고 인정하여 그를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취임 직후 시민단체인 ‘참여연대’가 그의 도덕성 문제를 제기하였고, 이를 계기로 ‘민교협’, ‘전교조’ 등 다른 시민 노동단체들도 함께 연대하여 그의 사퇴를 강하게 요구하고 나섰다. 언론에서도 이 문제를 크게 취급하여 그의 도덕성과 관련된 다른 문제들을 계속 밝혀 보도하였고, 결국 그는 스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 국가나 정부, 정권이 취하는 권한 행사나 정책들이 더 이상 시민사회의 감시의 눈초리를 벗어나기 힘들고, 시민사회로부터의 동의를 구하지 못하고 실행되기도 어려워졌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는 비단 정부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회, 정당, 사법부, 지방자치단체나 지방의회, 나아가 재벌을 위시한 기업들도 점차 시민단체들과 그들이 주도하는 시민적 ‘여론’의 감시와 압박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지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우리 지역 최대의 공기업으로 수 천명의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있는 대표적인 공기업인 한국중공업의 경우, IMF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정부가 공기업 민영화 정책을 취하는 가운데 한국중공업의 민영화도 서둘러 진행시키려 하자,  이를 반대하는 한국중공업 노동조합과 함께 지역의 십여 개의 시민단체들이 함께 참여하여 ‘한국중공업 민영화 저지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다양한 여론화 작업, 시민 선전 켐페인, 정부와 회사에 대한 항의 집회 등을 계속했다. 이러한 시민단체들의 활동이 커다란 압력으로 작용하여 정부는 한국중공업의 민영화를 본격적으로 진행시키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다른 지역들에서도 다양한 시민단체들이 교육, 환경, 복지, 지역 행정과 정치 등 다양한 영역의 다양한 쟁점들을 가지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본다. 지난번 강원도 영월의 ‘동강 댐 건설’ 문제에서 보았듯이, 이런 쟁점들 중에서 어떤 것들은 전국적인 쟁점으로 비화되어 전국의 수많은 모든 시민단체들이 함께 연대하여 대응하기도 한다. 지난 4.13 총선 당시 부적격 정치인들의 낙선운동을 주도했던 ‘총선연대’는 그 대표적인 사례였고, 이 운동은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주어 일본의 경우 시민단체들이 직접 찾아 와 이를 배우고 일본 총선 당시 유사한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1999년 말 미국 시애틀에서 벌어진 사태는 더욱 극적이었다.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던 미국 시애틀에는 전세계의 수많은 시민단체 대표들이 집결하여 WTO에 반대하는 항의 집회와 시위, 그리고 심지어는 경찰과의 격렬한 충돌까지 빚으면서 결국 이 회의를 사실상 무산시켜 버렸다. 이를 계기로 WTO와 IMF 등 전세계적 차원에서 신자유주의적 경제질서와 무역질서를 구축해 나가기 위한 핵심적인 국제기구들은 최근 급격하게 위축되어 많은 직원들이 사표를 내고 떠나는 상황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많은 관찰자들로 하여금 지금의 시대를 ‘시민사회의 시대’로까지 묘사하게 만드는 근거가 되고 있다. 이제 어느 나라의 정부도, 초국적 기업도, 국제기구들도 시민단체들과 그들을 지지하고 후원하는 시민들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우리의 경우 비교적 최근에 이르기까지도 평범한 시민들이 정부나 거대 기업에 맞서 독자적인 목소리로 자신들의 입장을 주장하고 관철시키려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거대하고 강력한 국가 권력, 그리고 엄청난 경제적 힘을 가진 기업들은 시민사회의 눈치를 살필 필요 없이 일방적으로 권력을 행사하고 정책을 결정하고 오로지 이윤추구만을 위해 질주했다. 이에 저항하려 한 소수의 사람들은 권력과 자본의 힘 앞에서 무자비하게 탄압받고 억압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고, 빠른 속도로 바뀌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상황의 변화에 따라 나타난 단기적인 현상이 아니라 앞으로 계속 진행될 수밖에 없는 커다란 역사적인 추세라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

우리의 경우 시민사회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서구보다 훨씬 늦었다. 시민운동의 활성화를 그 기점으로 생각한다면, 한국의 시민사회가 국가나 자본의 영향력을 벗어나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여 년 정도라고 말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1987년의 ‘6월 항쟁’이 그 계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서구의 경우 시민사회의 형성과 활성화는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백여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한국과 같은 많은 제 3세계나라들에서는 20세기 말에 이르기까지도 시민사회는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크게 두 가지 이유를 가지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이들 나라들이 근대에 접어들면서 모두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다는 것이다. 서구 제국주의 식민통치는 제 3세계 나라들이 독자적으로 전근대사회를 청산하고 근대적 시민사회를 형성시킬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했다. 다음으로, 전후 정치적 독립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대다수의 제 3세계 나라들은 경제적 낙후와 정치적 독재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이것 역시 이 나라들의 내부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서구 식민 통치의 유산,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의 신식민주의적인 경제적 수탈, 그리고 전세계적 냉전체제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다. 따라서 한국을 포함하여 제 3세계 나라들에서 활성화된 시민사회에 기반을 둔 다양한 시민단체와 시민운동의 성장, 시민사회의 성장은 대체로 20세기 말에 가까워서야 가능했다. 특히 냉전체제가 해체되고 정치적 민주화의 물결이 여러 나라에서 거세게 일어난 1980년대 후반이 그 계기가 되었다.

1/2 시민사회 형성의 역사: 국민국가와 시민사회

1) 국민국가와 시민사회의 형성: 자본주의와 시민혁명

시민사회는 근대의 산물이다. 근대 이전의 사회는 시민사회가 아니라 공동체사회이다. 일찍이 알프레드 퇴니스는 이를 공동사회(Gemeinschaft)와 이익사회(Gesellschaft)로 나누어 분류한 바 있었다. 여기서 공동사회 혹은 공동체사회는 지금과 같이 국가와 (시민)사회가 전혀 분리되지 않은, 그래서 공적 영역과 사적영역의 분화도 없었고, 국왕과 귀족 혹은 성직자와 같은 지배신분층이 하위 신분층의 모든 사람들을 전인격적으로 지배하고 착취하는 구조의 사회였다. 이것은 동양사회도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우리 전통사회의 구조를 잘 보여주고 있는 [춘향전]을 생각해보자. [춘향전]의 사또인 변학도는 요새 식으로 말하자면 군수 정도의 위치에 있는 공직자이지만, 그는 기생과 같은 천민들은 물론 일반 평민들조차도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지배할 수 있는 전인격적인 지배자였다. 비슷한 시대, 짜르 전제왕조 하의 러시아의 한 농촌 귀족(영주)는 그가 지배하는 농노들의 잘못을 다스리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나에게는 짜르(황제)가 신이요 하늘이다. 그러나 너희들에게는 내가 신이요 하늘이다. 하늘이 땅의 잘못을 천둥과 번개의 노여움으로 다스리듯이, 나는 너희들의 잘못을 채찍으로 다스릴 것이다.”(홉스봄, [혁명의 시대], 한길사)

서구에서 이런 전근대적 공동체 사회를 균열시키고 해체시킨 힘은 두 가지로 표출되었다. 그 하나는 자본주의 산업혁명이고, 다른 하나는 시민혁명이다. 자본주의 산업혁명은 봉건적인 공동체 사회구조 속에서 신분이나 정치적 지배력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힘, 즉 경제력에 기반을 둔 새로운 사회세력을 발전시켰다. 부르주아 자본가층이 그들이다. 이들은 봉건사회에서 상업과 수공업을 통해 점차 경제적 힘을 축적해 나갔지만, 신분적으로는 여전히 하층 피지배층의 지위를 벗어나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의 경제력이 커감에 따라 점차 도시를 중심으로 봉건적 지배층의 지배를 벗어나는 ‘자치도시들’이 형성되었고, 자치도시들간의 긴밀한 연대관계도 형성되었다. 상인과 수공업자들은 ‘길드’라고 불린  강력한 자신들의 연대조직을 만들어 봉건영주에 대항해 나갔다. 이들의 경제적 힘이 정치적 힘으로 축적되어 폭발한 것이 시민혁명이다. 프랑스 시민혁명이 그 대표적인 것인데, 부르주아지들은 시민혁명을 통해 드디어 봉건적 지배체제 자체를 타파해 나간 것이다.

봉건적 지배체제의 붕괴에는 물론 부르주아 뿐 아니라 다른 피지배층들, 특히 농민층의 저항이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이들은 봉건체제의 붕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대신할 새로운 사회체제를 만들어갈 능력은 갖지 못했다. 그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부르주아였고, 이들은 봉건사회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가치, 새로운 규범, 새로운 질서, 새로운 정치체제를 형성시켜 나갔다.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사회, 정치적으로는 공화정 체제, 사회적으로는 시민사회를 형성해 나간 것이다. 이들의 사상은 당시에는 근대적인 계몽주의 사상이 대표했다.

부르주아지는 농업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상업과 공업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따라서 그들은 봉건 연주나 지주들에게 예속되어 있었던 농노나 농민들을 신분적으로 해방시켜 도시로 이끌어 내어 자신들의 공장이나 상점에서 일하는 노동자로 고용할 필요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봉건적 신분사회의 구조를 그대로 둔 채 자신들이 새로운 신분적 지배층이 되고자 할 이유가 없었다. 이들에게는 신분제의 유지가 아니라 신분제의 타파가 절대적으로 이익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을 포함하여 모든 피지배 신분의 해방, 봉건적 신분제도의 해체를 목표로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들이 주도한 시민혁명은 다른 피지배층들에게도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시민혁명은 이렇게 진행되었고, 이제 모든 사람들은 신분적으로 평등한 인격적 주체라고 선언될 수 있었다. 봉건적 질곡에서 해방되어 평등한 인격적 주체로 상정된 새로운 인간, 이것이 시민(citizen)이며, 이 시민들로 구성된 사회가 곧 시민사회인 것이다.

이 시민들은 새로운 공화주의 국가체제 하에서 하나의 국민(nation)을 형성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공화제 국가는 이제 비로소 국민국가가 되었다. 국민국가의 형성, 그리고 시민사회의 형성은 동전의 양면처럼 진행되었던 것이다. 법 앞에 평등한 동등한 인격적 주체들이 공적인 영역에서는 국민의 일원이 되고, 사적인 영역에서는 천부의 인권을 가진 시민으로 존재하는 것, 이것이 근대 국민국가, 시민사회의 원형, 이념형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념형이었을 뿐 현실이 곧 이대로 된 것은 아니다. 프랑스를 기준으로 하면, 시민혁명의 이러한 원칙은 현실에서 곧바로 실현된 것이 아니라 심각한 왜곡에 직면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이 천명한 이념에 따라 사회를 구성하고 운영할 경우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들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하층민들, 점차 도시로 모여들고 공장으로 모여들어 노동자로 살아가기 시작한 해방된 농노나 농민들, 이제는 프롤레타리아가 된 이들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을 자신들이 소유한 공장에서 저임금, 장시간노동으로 열심히 일을 시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이것이 그들의 기반이 되고 있었는데, 점차 이들이 이러한 현실을 거부하고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만일 이들에게 평등한 시민으로서의 모든 권리, 특히 참정권을 부여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부르주아지는 그들이 지배하는 새로운 세상이 되자 원래의 약속을 뒤엎고 새로운 신분적 지배체제, 즉 계급적 지배체제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과거의 신분사회로 돌아갈 수는 없으므로, 이제는 경제력, 재산의 소유가 그 새로운 기준으로 다시 천명되었다. 자유의 핵심은 소유의 자유이며, 평등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재산소유의 정도에 비례하는 상대적인 것이 되어야 했다. 재산을 소유하고 따라서 재산세를 납부해서 국가의 유지에 기여하는 사람들만이 정치적 권리를 가질 수 있다. 재산세를 많이 내는 사람은 더 많은 투표권을, 적게 내는 사람들은 적은 투표권을 가지는 것이 진짜 평등이다.

점점 그 숫자가 늘어나는, 그리고 점차 이 새로운 현실을 자각하게 된 프롤레타리아, 노동자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노동자들이 보기에 그들은 아직 국민도 아니었고 시민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도 평등한 권리를 가진 시민적 주체임을 주장하면서 그들에게도 참정권(선거권)을 달라고 요구하고 싸우기 시작했다. 19세기 중후반, 유럽 사회 전체는 이 갈등이 혁명으로까지 이어지는 격렬한 대립을 보이고 있었다.(차티스트 운동) 프랑스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이 갈등은 시민혁명 이후 거의 100년을 끌었다. 결국 1870년대에 들어서야 프랑스에서는 지금과 유사한 근대적 공화제 국가가 다시 출발할 수 있었다. 다른 나라들이 이보다 더 늦었음은 물론이다.

요컨대, 부르주아지는 근대 국민국가, 시민사회 형성의 개척자적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을 실질적으로 완성시켜 나간 것은 부르주아지가 아니라 새로이 등장한 노동계급과 노동운동이었다. 격렬한 대립과 충돌, 엄청난 피의 희생을 치르고서야 부르주아지는 그들을 동등한 시민적 주체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서구의 시민사회는 이런 과정을 통해 형성되어 간 것이다.

국민국가와 시민사회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었다면, 그 구성원리는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 되어야 했다. 우선, 동등한 시민적 권리의 주체인 시민들은 비록 경제적 지위는 다르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의 개인적, 사적 영역을 보호받고 그 속에서 가족과 이웃, 집단으로 자유롭게 교류하며 사회적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일상생활을 영위해 나간다. 국가(정부)는 이 시민사회 위에 군림하면서 시민들을 통치하는 별도의 주체가 아니라, 이 시민들이 행사하는 정치적 권리(참정권)에 의존하는 것이다. 즉 시민들은 각자의 생각과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 다른 정당을 구성하고 가입할 수 있으며, 혹은 자기가 원하는 정당에 투표함으로써 자신들의 대표를 선출하여 국가를 운영하게 한다. 따라서 국가(정부)는 시민사회 내에서 다수의 공공적 여론을 형성하고 정치적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세력에 의해 일정 기간 동안 운영되는 것이며, 이 정치적 지지의 변화가 생기면 그것이 곧 국가권력에도 반영되는 그런 성격의 것이다. 더 이상 국가는 국민을 지배하고 억압하고 이끌어 나가는 주체가 아니며, 그 통치자는 오로지 한시적인 권력 위임을 받은 존재에 불과하다. 그가 인민의 의지를 배반하면 언제든 그는 소환되고 교체될 수 있다. 국가보다는 사회(시민사회)가 우선적인 가치를 지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는 될 수 있으면 작은 국가, 시민사회에 개입하지 않고 그 외곽에서 이를 보호하고 지원하는 존재가 되어야 했다.

2) 잊혀진 시민사회: 사회주의와 복지국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서구에서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이런 성격의 국가, 시민사회가 형성되어 갔다. 물론 그 과정이 결코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며, 나라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독일처럼 이 과정이 늦었던 나라도 1차대전 이후에는 봉건적 군주제가 몰락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서는 등 전체적인 변화의 방향은 일치하고 있었다. 그 후에도 파시즘과 같은 괴물이 등장하여 엄청난 재앙이 다시 나타나기도 했지만, 큰 흐름은 유지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후, 특히 2차대전 이후 서구에서는 다시 한동안 시민사회보다는 국가가 절대적 우위를 점하게 되는 역전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그 계기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사회주의 국가의 등장이다. 러시아 혁명으로 수립된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은 마르크스의 원래 생각과는 상관없이, 그리고 그 초기의 혁명정신과도 무관하게 점차 새로운 국가중심주의적 체제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를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 체제’였다고까지 보고 있다. 문제는 2차 대전 이후 이 체제가 유럽의 동쪽 절반에까지 확산되었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경제공황의 경험을 겪으면서 형성된 케인즈주의적, 수정자본주의적 복지국가 체제의 등장이다. 소련과 동구와는 다른 맥락에서였지만, 서구에서도 대공황의 경험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본주의 경제에 국가가 깊이 개입하여 이를 관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하였다. 따라서 전후 서구 거의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국가의 경제 개입이 강화되었고, 국가 재정을 통한 경기조절이 일반적인 방식으로 되어 갔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국가는 점차 교육, 의료, 사회보장 등 개인 생활의 중요한 부분을 직접 담당하는 주체가 되어 갔다. 대공황과 전쟁의 참혹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이제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더욱이 전후 오랜 기간 동안 이 방식에 의해 경제성장이 계속되고 복지생활이 향상되면서 사람들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말하자면 경제적 안정과 물질적 풍요를 대가로 시민사회의 일상생활 깊숙이 침투하는 국가 영역의 확장을 용인하는 분위기가 된 것이다.

시민사회론 1-2

1/3 시민사회의 재흥

서구에서 시민사회가 사람들의 관심의 초점으로 떠오르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커다란 계기가 있었다. 그 하나는 “68년 혁명”이다. 이것은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에 걸친 서구 여러 나라에서 대두된 급격한 학생운동, 반전평화운동, 문화운동이다. 서구 사회는 이 “68혁명”을 계기로 커다란 변화를 겪었고,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전개된 이 혁명의 여파는 이후 서구 사회에 길고도 넓은 파장을 미쳤다. 이를 계기로 서구 사회에서는 다양한 ‘새로운 사회운동’이 사회 전 영역에 걸쳐서 활발하게 활성화되게 된다. 이 새로운 사회운동은 노동운동이나 계급운동과 같은 전통적 사회운동과는 달리 생태주의적 환경운동, 여성해방운동, 반전반핵 평화운동, 인권운동, 소수민족 해방운동, 소비자 권리운동, 교육운동, 영화예술 및 문화운동, 지방자치운동 등 특정 계급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사회계층들이 참여하는 폭넓은 연대적 시민운동으로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두 번째의 커다란 계기는 1980년대 말의 냉전체제의 해체, 그리고 곧이어 급격히 진행된 소련과 동구권 국가의 연쇄적인 붕괴이다.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은 ‘개인의 자유가 만인의 자유의 기초가 되는—자유로운 소생산자들의 연합체’라고 하는 마르크스적인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와 단일 지배 정당, 그리고 그것을 장악한 ‘노멘크라투라’라고 하는 새로운 관료적, 정치적 지배집단이 지배하는 ‘명령형 경제와 통제된 사회’의 모습으로 전락했던 ‘국가사회주의’ 체제의 종말을 가져 왔다. 이 과정에서 구동독, 체코, 폴란드 등 여러 동구권 나라들에서 국가권력에 저항하여 다양한 자발적인 네트웤을 형성해온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시민 동원이 이루어졌으며, 이를 이끈 주체들이 사회주의 정권 몰락 이후 선거를 통해 집권하여 전과는 다른 모습의 다원주의적 사회체제를 이끌어 나갔다.

1) ’68혁명’

68혁명을 이끈 젊은 학생세력들은 서구의 역사 속에서는 ‘풍요로운 세대’의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은 전후 서구 경제의 장기 호황 속에서 그 앞 세대들이 겪었던 엄청난 고통들, 즉 가난, 불평등, 파시즘과 같은 정치적 억압들로부터는 이미 해방된 ‘축복받은 세대’였다. 기성세대들이 보기에 이들의 불만은 ‘고생해보지 않은 젊은이들의 배부른 투정’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었다. 기성 세대들은 오랜 고생 끝에 이룩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경제, 복지국가 체제에 대해 더할 나위 없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젊은 학생들은 이 기성세대들이 보지 못하고 있었던 다른 점들을 꿰뚫어 보고 있었고, 민감한 감수성으로 그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나섰다. 그들이 보기에 서구 사회가 누리고 있는 경제적 풍요는 단지 앞 세대들의 노력에 의해서 이룩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창의성의 포기, 보다 높은 정신적 가치의 몰락, 가난한 제 3세계 나라들에 대한 선진국들의 경제적 착취를 대가로 한 것이며, 무엇보다도 핵무기로 무장된 동서 냉전체제가 압박하고 있는 인류 공멸의 위기 속에서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는 것이었다. 특히 한창 가열되고 있었던 ‘월남전’은 이들이 보기에 자본주의 선진국들의 위선과 도덕적 타락의 전형으로 비추어졌다. 학교제도는 이러한 기성세대의 전도된 위선적 가치들을 권위주의적으로 젊은 세대에게 강요하는 억압적 교육체제로 비추어 졌다. 프랑스의 학생들은 드골 정권의 알제리 해방운동에 대한 무력 진압에 항의했고, 미국의 대학생들은 부도덕한 월남전을 종결시키기 위해 목슴을 건 투쟁에 나서고 있었다.

‘자유민주주의’는 구호에 불과할 뿐, 실제로는 사회 구석구석에 눈에 보이지 않는 억압과 통제가 만연되어 있고, 경제적 풍요의 이면에서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소외된 기계적 노동에 내몰려 ‘일하는 기계’, ‘소비하는 동물’이 되어 이성적 사고와 해방적 가치를 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노동운동은 이제 계급해방, 인류해방의 이념을 잃고 단지 더 많은 경제적 보수와 더 풍요로운 소비생활의 단물만을 좇는 보수적인 운동으로 전락한 것으로 보였다. 가부장적 가족제도 속에서 여성은 여전히 전통적인 억압의 사회 속에 방치되어 있었다. 왜 싸워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면서도 단지 ‘국가가 요구하기 때문에’ 영장을 받고 지구 반대 쪽 가난한 나라의 민주들을 대상으로 무자비한 살상 행위를 반복해야 하는 월남전을 이 세대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교육도, 학문도, 언론도, 문화와 예술까지도 이들이 보기에는 ‘거대한 위선의 구조’의 일부였을 뿐이다. 이들은 이러한 기존 사회체제의 ‘모든 것을’ 거부하고자 했고, 따라서 그들의 저항은 전면적인 것이었다. 모든 것에 의문이 제기되었고, 모든 것인 불신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자유주의든 사회주의든 전통적인 철학과 사상과 이념과 이데올로기는 모두 답이 되지 못했다. 따라서 이들은 모든 것을 거부하고 모든 것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파괴하는 급진적인 운동을 실천에 옮기면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그 답을 찾으려 한 것이다. 중국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마오 쩌뚱의 문화혁명, 큐바혁명의 카스트로와 체게바라, 스탈린에 의해 축출되어 멕시코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살해된 러시아 혁명의 영웅 레온 트로츠키, 한국의 4.19 학생혁명과 그 영향을 받은 터어키의 학생운동, 터어키의 혁명가 케말파샤와 이집트의 풍운아 낫세르, 이런 운동과 인물들이 이 세대의 새로운 희망으로 열렬히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아예 모든 자본주의적 물질문명과 단절하고, 모든 기성의 종교와 윤리와 도덕을 벗어 던지고, 모든 사회제도, 심지어 가족제도까지도 부정하고 인간 내면의 절대적인 자유와 평화, 그리고 원초적인 인간애를 추구하는 ‘히피운동’까지 거세게 일고 있었다.

프랑스의 경우 이 68혁명의 직접적인 여파로 20여년 이상 절대적인 통치자로 군림하고 있었던 2차대전의 국민적 영웅 드골이 권좌에서 물러나는 사태까지 나타났다. 미국 정부는 결국 학생들의 항의와 그에 대한 국민 여론의 지지에 무릎 꿇고 월남전의 종전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68혁명은 그 주도 세력이 젊은 대학생 층이었다는 점에서 기존의 어떤 ‘혁명’과도 성격을 달리한다. 이 혁명으로 혁명의 주도세력이 새로운 권력층이 되지도 않았고, 기존의 사회체제가 근본적으로 변혁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혁명은 기존 체제의 내부에 커다란 균열을 야기하고 기존 체제의 도덕적 정당성을 결적적으로 훼손시켰으며, 따라서 체제는 유지되었으되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이 체제를 운영할 수는 없게 되었다는 점에서 일종의 ‘내부 혁명’ 혹은 그 내용상 ‘문화혁명’으로 불린다.

변혁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68혁명의 파장은 길고도 넓었다. 이 혁명을 주도했던 당시의 젊은 세대들은 백발이 성성한 지금도 스스로를 ’68세대’라 부르며, 그들이야말로 나이와 상관없이 진정으로 ‘젊은 세대’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68세대’들은 이후 사회 각 부문에서 자신들이 소중하게 생각했던 가치와 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다양한 사회운동을 발전시켜 나갔다. 전통적인 사회운동이나 정치운동과는 달리 그들은 국가권력을 장악하여 사회를 개조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대신에 ‘시민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자신들의 ‘해방적 관심’을 구현하기 위한 크고 작은 교두보들을 쌓아 나가려했다. 반전평화운동, 신교육운동, 여성해방운동, 소수민족 민권운동, 소비자운동, 환경운동 등 소위 ‘신사회운동’이 그것이다. 권력을 통해 구조를 바꾸어 사회를 변화시키려 하기보다는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서로를 변화시키고, 그 속에서 새로운 사회적 연대의 네트웤을 형성시키고, 이의 확산을 통해 거대한 권력과 자본의 힘을 제어해 나갈 삶의 교두보를 확보해 나간다는 것이 그들의 기본 전략이었다.

* 참고: [신좌파의 상상력]이라는 책이 있음. 매우 읽기 어려운 책이지만 “잠 안 올 때” 두고두고 읽을 가치가 있는 책임. 지금은 발행이 중단된, 그러나 다시 속간 준비 중에 있는 월간지 [월간 사회평론 ‘길’]이 1998년 5-6월에 68혁명 특집 기사들을 실었음. 도서관, 혹은 합성동에 있는 민간도서관 ‘책사랑’에서 구할 수 있음. 나한테도 있음.

2) 동구혁명

1989년 동독의 시민들이 대거 동독을 이탈하여 체코와 헝가리 국경으로 몰려 가 서독으로 넘어갈 것을 요구하면서 연일 농성을 벌이는 사태가 빚어졌다. 동독은 이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결국 포기하였고, 헝가리와 체코는 국경을 개방하여 이들의 서독행을 허가했다. 이 사태는 결국 동독 내부로 번져 수많은 동독인들이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 가 국경 개방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결국 국경은 무너졌고 동독은 몰락했으며 독일은 통일을 이루었다. 이어 체코, 헝가리, 폴란드, 루마니아, 알바니아 등으로 사태는 도미노처럼 확산되었고, 이들 나라들도 모두 무너졌다. 불행하게도 루마니아와 알바니아에서는 유혈사태가 벌어졌지만 결국 기존 정권이 무너졌으며, 유고슬라비아는 민족분규가 일어나 대규모의 내전이 전개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여파는 소련으로까지 미쳐, 결국 소련은 해페되어 전후 소련에 강제 통합되었던 나라들이 속속 독립했으며, 러시아에서도 고프바초프 정권을 마지막으로 공산당의 일당독재는 종결되었다. 이후 러시아는 옐친 시대를 거쳐 지금의 푸틴 정권에 이르고 있지만, 러시아도 더 이상 과거의 소련과 같은 국가사회주의 체제는 아니게 되었다. 이 과정을 ‘동구혁명’이라 부른다.

동구혁명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변수들이 장기간에 걸쳐 작용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라 간단히 그 성격을 규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동구 여러 나라들, 특히 헌가리, 폴란드, 체코 등과 같은 주요 동구 국가들에서는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레흐 바웬사가 이끈 폴란드의 자유노조(솔리다리치) 운동, 헝가리의 하벨 등이 이끈 벨벳(보라빛) 혁명 등이 그것이다. 체코의 경우는 이미 1968년에 서구 68혁명의 여파 속에서 대대적인 자유화 운동이 일어났고 수많은 지도적 지식인들이 서명한 ’68헌장’이 발표되어 열렬한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으나, 결국 바르샤바 조약 체제하에서 대규모의 소련군이 침공하여 이를 좌절시킨 경험이 있었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소설과 이를 영화화한 “프라하의 봄”을 참고할 것. “프라하의 봄”은 비디오 가게에 많이 있는데, 상하 두 개로 된 장편이다. 이 영화를 오락적인 관점에서만 보는 엉터리 학생들이 경남대학교에는 없을 것으로 믿는다.
* 전태국 교수가 쓴 [국가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책이 있음. 매우 어려운데, 강의 시간에 직접 소개할 예정임.

동구혁명을 어떻게 볼 것인가도 매우 복잡한 문제인데, 우리의 경우 현재 진행중인 남북관계의 변화와 관련해서 학생들이 꼭 알아두어야 할 점들이 많이 있음. 동구 혁명은 ‘현재진행중’이므로 강의 시간에 보완하도록 하겠음.

1/4 한국의 시민사회

1987년 6월 항쟁이 한국의 시민사회 형성과 활성과, 시민운동 발전의 결정적 계기였음.
오늘은 힘이 달려 이 정도로 하고 추후 강의시간에 내용을 설명하고 원고를 다시 작성하여 나중에 올리겠음.

시민사회론 제 2-2강(2,000년 9월 8일)

1/4 국가-시민사회-시장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해보도록 하자. 현대의 시민사회는 과거와 달리 국가권력 뿐 아니라 자본으로부터도 자기 자율성을 지켜야 할 이중적 과제를 안고 있다. 이를 간단히 그림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             +————————-+
|   국가                |             |              자본(시장) |
|             +———+————-+———-+              |
|             | 정치사회|             | 기업사회 |              |
+————-+———+             +———-+————–+
|           시민사회               |
|                                  |
+———————————-+

1) 국가-정치사회-시민사회: 간접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

국가가 시민사회에 일상적으로 개입하고 통제하는 비정상적인(그러나 많은 나라에서는 오히려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한다면, 두 영역 사이에 존재하는 정치사회가 양자를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 정치사회는 통상 정당과 의회의 활동영역인데, 그 외에도 시민사회에서 형성되는 공론(public opinion)이 국가로 전달되고 반영되는 다양한 채널들이 있을 수 있다. 예컨대 여론전달 매체들(언론), 노동조합이나 시민단체 등 여러 조직들이 정당과 의회를 통해서 혹은 직접적으로 국가(정부)에 의사표현을 하고 압력을 행사하는 공청회, 토론회, 항의집회나 시위 등이 이에 해당한다.

정당은 시민사회에 뿌리를 두고 시민사회 내에서 자신의지지 기반을 확보하며, 일상적인 정치활동 과정에서는 이를 반영하는 정책 및 입법활동을 전개한다. 선거의 시기에는 다수 득표를 얻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정상적인 정당조직이 존재하는 경우, 시민사회의 다양한 이익집단들의 이익이나 이해갈등도 정상적으로 조율될 수 있으며, 다양한 사회문제나 쟁점들도 정치사회를 거쳐 국가로 수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굳이 우리나라의 비정상적인 정당체제가 아니라 하더라도, 선거 승리를 최고의 목표로 하는 정당들과 정치인들 자체의 이해관계(득표)가 이 과정을 왜곡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시민사회가 활성화되게 되면 시민운동, 사회운동 조직들은 정당을 매개로 하기보다는 자신들 스스로가 독자적인 채널과 방법을 통해, 특히 공론 형성을 통한 여론의 압박과  직접적인 행동으로 국가 뿐 아니라 정당들까지도 감시와 견제와 견인의 대상으로 삼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이는 시민사회의 민주주의와 정치사회의 민주주의가 본질적으로 그 성격을 달리하기 때문인데, 후자는 대의제 간접민주주의를 원리로 하는 반면 전자는 직접민주주의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사회 단위가 커지면 직접민주주의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전제 하에서 어느 나라나 대의제 간접민주주의가 일반화되어 있으나, 이 제도는 국가 뿐 아니라 정당까지도 권위주의적이고 관료적인 정치기구로 전락시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정당의 관료적 운영을 외부로부터의 감시와 견제, 그리고 주기적인 선거만으로 통제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사회운동 단체들은 직접민주주의를 통해 이를 대체하거나 보완하려는 경향을 갖는다.

2) 자본(시장)-기업사회-시민사회: 경제민주주의

사회구성원들의 대다수는 어떤 형태로든 기업에 고용되어 임금을 받아 생활하는 임금소득자이다. 자본은 기업경영을 통해 사회 구성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며, 따라서 기업사회는 자본과 시민사회를 매개하는 경제생활의 가장 중요한 제도 영역이다.

물론 자본은 기업을 매개로 하지 않고서도 직접적으로 시민사회의 여러 부문에 직, 간접적으로 개입한다. 예컨대 자본은 여러 가지 비영리적 재단(財團)을 설립하여 문화, 예술, 학문, 복지, 교육 등의 분야에서 사회에 ‘봉사’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런 재단들이 자본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율적으로 운영되면 이는 더 이상의 자본의 기관이 아니라 시민사회 내의 기관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많은 경우, 자본은 그러한 비영리적 공공부문조차도 이윤추구의 경제적 시장으로 파악하거나 그렇게 바꾸어 나가려는 강한 경향을 보인다. 예컨대 지금은 몰락 위기에 처한 한국의 재벌 대우는 1980년대 위기를 겪으면서 재벌 회장의 재산을 출연하여 ‘대우문화재단’을 설립하고 이를 통해 장학사업, 예술사업 등을 전개했다. 그러나 실제로 대우문화재단은 이후 대우 그룹의 자회사 주식을 소유하고 이를 통해 재벌 회장의 지배력을 유지하는 사실상의 지주회사(holding company) 역할을 해왔다.(재벌 지주회사 설립은 불법이었음)  이것은 수많은 사례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자본은 도로, 항만, 철도, 전력 등 사회간접자본 분야, 의료, 교육, 사회보장 보험, 언론 등 다양한 공공부문을 최대한 민간기업의 활동 영역으로 전환시켜 이를 시장화하고 여기에서도 막대한 이윤을 추구하려 한다. 이는 시민생활의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며, 사회 전체를 시장의 논리, 경쟁의 논리, 상품 물신주의의 논리로 바꾸어 나가는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이러한 자본의 영향력 확대를 막고 자본의 이윤논리가 지배하는 영역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은 시민운동, 사회운동의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되어 있다.

자본의 이윤추구 활동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자본은 자신의 이윤추구에 필요한 정부 정책을 이끌어내기 위한 목적으로 정부와 정치사회에 대해서도 활발한 공식적, 비공식적 로비활동을 전개한다. 정경유착, 정치자금 제공, 뇌물을 통한 매수, 불법 로비활동, 언론 매체를 통한 여론 조작 등 다양한 문제들이 이 과정에서 발생한다. 나아가 대규모의 환경파괴, 각종의 투기, 도시 주거공간의 왜곡 등도 이 과정에서 무수하게 발생한다.

따라서 자본의 운동, 이윤동기에 의한 시장의 확대 등을 막아내는 일은 시민운동, 사회운동의 점점 더 큰 과제가 되고 있다. 이 과제는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추진된다. 첫째는 기업제도(소유구조, 지배구조)를 합리화하고 투명화하는 작업이다. 둘째는 기업의 의사결정과정에 노동자와 소비자, 시민이 참여하는 경영참여제도를 만드는 과정이다. 셋째는 공공영역에 기업의 이윤 추구 논리, 시장의 논리가 침투하지 못하도록 막고 나아가서는 공공영역을 확장해 나가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뿐 아니라 전세계의 수많은 민간 사회운동단체들은 각각의 나라에서는 물론, 국제적인 차원에서도 이런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다양한 네트웤을 형성하고 국제적 연대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민주주의를 경제의 분야에로까지 확대하려는 노력으로 성격지어질 수 있다. 민주주의는 정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경제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경제민주주의, 산업민주주의라는 개념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3/5 결과와 평가

겉으로 나타난 결과만 놓고 보면 프랑스 68혁명 혹은 5월 운동은 실패했다. 나중에 드골이 스스로 물러나긴 했지만, 선거 결과는 드골주의자들의 압승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프랑스 사회는 이후 과거와는 질적으로 다른 사회로 변화해 나갔다. 그리고 이 변화는 단순한 정치변동이나 경제적 변동이 아니라 공장과 기업, 학교, 병원, 지역사회, 학문과 사상, 문화와 예술, 가족과 인간관계, 사람들의 생각과 생활방식 등 전반적인 것이었다는 점에서 실패한 혁명으로서의 68혁명은 동시에 거대한 문화혁명이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프랑스 68혁명에 대한 서로 다른 평가들을 간단히 살펴보자.

1) 전통적인 이데올로기적 평가
권력 당국이나 보수 세력들, 그리고 전통적인 사회주의 정당들은 이 운동을 과거의 관점에서 여전히 이데올로기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예컨대 드골 대통령은 이 운동을 “정치권력에 미친 자들과 원한에 사로잡힌 자들이 공화국을 전복시키고 정권을 잡기 위해 일으킨 운동”이라 보았고, 퐁피두 수상은 “직업적 혁명가, 독오른 사람들, 감정이 고양된 사람들, 무정부주의자 등이 학생과 청년을 선동한 것이고, 그 다음 단계에서는 공산당이 경제를 마비시키며 권력을 장악하고자 한 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프랑스 공산당 역시 이 운동을 전통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프랑스 공산당은 이 운동이 “아직 혁명의 조건도 성숙하지 않았고 노동자들도 혁명적 운동을 바라고 있지도 않은 상황에서 일부 급진주의 정치세력, 혁명운동 세력들이 젊은 학생과 결합하여 과도하게 모험주의적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프랑스 공산당과 공산당 계열의 노조인 CGT는 운동이 격화되자 오히려 서둘러 이를 진정시키려 애썼으며, 정부와 타협하고 사태를 기존 질서의 테두리 안에서 해결하려는 자세를 보였다.

2) 문명의 위기
이 운동을 서구 문명의 위기 징후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프랑스는 전후 경제 부흥으로 대중소비사회가 되었고, 그에 따라 물질적 생활은 풍요해졌다. 그러나 일상생활은 상품화, 파편화되어 사람들은 노동생활에서나 일상생활에서나 모두 무의미하고 부조리한 삶을 영위하게 되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다. 예컨대 도므낙(Domenach; [에스프리] 편집장)은 이 운동이 계급운동도 아니고 억압받은 자들의 운동도 아니며, 새로운 정치체제 수립을 목표로 한 운동도 아니었다고 본다. 그는 “삶을 변화시키자”라는 구호에서 보듯이 이것은 새로운 문화,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려는 욕구에 의해 추동된 것이었다고 본다. 실존주의 신학자인 자크 마리탱은 이를 “모든 절대적인 가치들이 무화되고 의미의 진공상태만 남은 ‘형이상학적 병’에 걸려 살아야 할 이유를 모르게 되어 버린 젊은 세대의 의미추구 행동”이라 묘사했다.

3) 세계체제 위기론(Wallerstein)
이는 68혁명이 범세계적으로 확산된 운동이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68혁명은 전후 미소가 주도하는 냉전체제가 이완되면서 한편으로는 미국 헤게모니에 대한 저항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소련의 스탈리주의적 사회운동에 대한 저항이기도 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표출된 급진적인 이념과 사상, 그리고 직접적인 대중행동은 범세게적 차원에서 새로운 좌파(신좌파)의 출현을 알리는 것이었다고 본다. 이 신좌파는 과거의 좌파 운동과는 다음의 두 점에서 차이를 가진다. 첫째, 전통적인 노동계급운동, 그리고 계급적인 불평등이 운동의 핵심 주체나 쟁점이 되지 않고 여타의 사회계급, 계층들, 그리고 계급문제 외에 다른 요인에 의한 억압과 불평들도 마찬가지의 중요성을 갖는다고 본다. 둘째, 혁명은 더 이상 폭력에 의한 국가권력의 장악을 필연적으로요구하는 것이 아니다고 본다.

4) 새로운 사회운동의 용광로
68혁명을 가장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입장이다. 사회학자 알랭 투렌(Allan Touraine)은 60년대 말의 서구 사회는 이미 탈산업사회로 접어든 사회이며, 이 후기 산업사회의 지배게급은 지식과 정보를 독점하고 중요한 의사결정권을 독점적으로 행사하는 기술관료들이라고 본다. 그는 이런 사회에서는 노동과 자본 사이의 갈등은 더 이상 핵심이 아니며, 노동운동은 제도화되어 체제 내에 흡수되어 버렸다고 본다. 이 사회에서 새로운 저항세력은 전통적 노동계급보다는 기술자, 과학자, 연구종사자, 비서, 교사, 의료종사자, 매스컴 종사자 등 전문적 지식을 가지고 일하는 신중간계급이라고 본다. 이들이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체제에 저항하면서 해방적이고 반권위주의적이며 공동체주의적인 새로운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68혁명 당시에는 구사회운동과 신사회운동, 구노동계급과 신중간계급이 서로 얽혀 운동에 참여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전자보다는 후자가 운동을 주도하는 경향이 강했다. 앞으로 이 경향은 더욱 강화되어 68혁명 당시에 제기된 다양한 쟁점들을 지속적인 사회운동으로 연결짓는 운동들이 활성화될 것이다. 1970년대 이후 활성화된 여성운동, 환경운동, 지역운동, 주민자치운동 등은 68혁명의 계승자라고 할 수 있다고 그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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