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 다시 ‘지역공동체’를 생각한다- 김영철회원

김영철회원(계명대 경제학과)이 평화뉴스에 쓰신 칼럼입니다. 옮겨 싣습니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일어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기본적인 전제는 개인의 경제활동에 최대한의 자유를 제공하게 되면 사회는 가장 바람직한 방향으로 조직될 것이라는 것이다. 최근의 글로벌 금융위기는 자유가 인류를 해방할 것이라는 믿음이 최소한 경제 운영 방식에는 그대로 통용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다른 대안은? 개인의 경제 활동에 대한 충분한 자유를 부여하지 않고도 우리가 바람직하다는 어떤 방식으로 경제를 운용할 수 있을까? 만일 개인의 자유가 통제되어야 한다면 어느 정도까지 통제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 통제는 누가 담당해야 하는가?

케인즈주의와 코뮨주의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대체로 두 가지 방향에서 제시되고 있다. 그 하나는 개인의 경제 활동에 대한 자유를 가능한 한 보장하되 그것만으로 충분히 해결될 수 없는 것은 정부가 개입하는 것이다. 이른바 케인즈주의(Keynesianism)다. 다른 하나는 개인의 경제활동에 대한 완전한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공동체가 경제활동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른바 코뮨주의(commune-ism)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아 케인즈주의와 코뮨주의는 독특한 방식으로 현재의 문제를 타개하는 데 활용되고 있다. 일자리 문제를 생각해보자.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금융의 거품이 붕괴된 이후 일자리가 크게 줄어들고 있다. 이에 대해서 개인의 경제활동에 대한 무분별한 자유 ‘때문에’ 일자리가 감소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하더라도, 개인의 경제활동에 대한 충분한 자유가 주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자리가 충분하지 않다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개인의 경제활동에 대한 자유를 더욱 보장하는 방식으로는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가 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무엇인가 다른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낼 필요가 있다. 정부가 일자리를 만드는 일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 케인즈주의다. 이에 따르면 줄어든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부가 직접 일자리를 만드는 사업을 벌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점에서 보면 케인즈주의는 경제 운영과 관련하여 개인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에 전적으로 맡겨놓지 않고 정부가 부분적으로 개입한다는 의미에서 개인의 경제활동에 대한 자유를 제약한다는 것이지, 정부가 개인의 경제활동의 자유를 직접적으로 간섭하는 방식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정부가 직접 일자리를 만드는 것과 함께 최근 우리나라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것은 ‘일자리 나누기‘(job sharing)이다. 일자리 나누기는 말하자면 코뮨주의식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일자리 나누기는 남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서 나의 일자리를 일부 내어놓는 것이다. 공동체의 선을 위하여 개인의 경제적 자유가 희생될 수 있다는 것이 여기에 적용되는 기본적인 철학이다. 일자리 나누기를 코뮨주의라고 규정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은?

이러한 입장에서 본다면, 일자리 나누기가 우리 사회에서 경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선택되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서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경제 운영 방식과는 전면적으로 배치된다. 그렇기 때문에 일자리 나누기의 성공 여부는 우리사회의 장기적 발전 전망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실로 크다고 말해야 한다.

남을 위해 내 것을 희생하겠다는 결단에는 나의 희생에 대한 분명한 명분이 확보될 필요가 있다. 코뮨주의는 우리가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살기 때문에 공동체의 선이 나의 이익으로 연결된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개인은 따로 홀로 존재하며 살아갈 수 없고 공동체를 구성하여 서로 상생하는 구조 안에서 비로소 존재 가치가 발견된다는 기본적 인식의 전환을 코뮨주의는 요구한다.

일자리 문제와 해결은 물론이고 우리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위험성을 극복하기 위해 국가의 개입을 정당화하는 케인즈주의가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음은 이미 설명한 바와 같다. 그러나 케인즈주의는 단기적 처방에 불과하다. 케인즈는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고 없다(In the long run, we all die.)”라고 하며 단기적 처방을 옹호했지만, 사람은 장기적으로 죽고 없을지라도 경제는 장기적으로 살아남는다. 특히 최근 들어 경제의 장기 지속성(sustainability)에 대한 논의가 심각하게 진행되는 것은 경제가 단기적 관점에서 운영될 경우의 문제점을 사람들은 충분히 학습했기 때문이다.

개인의 경제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만으로 경제적 안정이 보장되지 않고, 케인즈의 처방이 장기적으로는 무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은 과연 무엇인가? 혹시 공동체가 논의의 중심을 확보할 때 대안의 가능성이 열리지는 않을까?

지역이 공동체로서 기능을 감당할 수 있을까?

전통적으로 우리 사회에 기능해 온 공동체는 가족과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국가의 공동체적 성격은 최근 빠르게 퇴색하고 있다. 자본과 재화, 그리고 노동과 자본이 쉽게 국경을 넘나드는 세계화의 시대에 국가라는 울타리가 공동체의 유의미한 경계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쉽게 수용하지 못한다. 더구나 국가의 울타리에서 사는 사람들 상호간의 심각한 부와 소득의 양극화 현상을 지켜보면서 그들은 상호 연대의식을 느끼기 보다는 오히려 서로에 대해 심한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국가의 공동체 기능이 약화되고 세계화의 회오리바람이 거세지고 있는 지금, 개인은 속수무책의 불안정한 존재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는가? 가족과 국가를 제외하고 우리가 그 일원으로 살아갈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지역이 공동체로서의 기능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대답하기 위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사실은 그동안 우리사회에서 지역이 독자적 공동체로의 기능을 담당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문자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 연후에야 우리는 지역 공동체를 위한 새로운 상상력을 펼 수 있다. 만일 여기서 말하고 있는 지역 공동체의 지리적 범위에 의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와 관련한 논의는 훨씬 뒤의 일로 미루어도 무방할 것이라는 의견을 가지고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이참에 우리는 지방분권론의 한계를 명확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사고 방식은 지방분권론을 또 다른 소중앙주의로 빠져들게 하는 모순을 낳았다. 그렇다고 한다면 어떤 대안이 논의될 수 있을 것인가? 코뮨주의를 우리의 실정에 맞게 재구성하는 방식은 어떨까? 지역 공동체가 경제활동의 주체가 되어 새로운 방식의 경제적 순환 관계를 찾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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